목차
Ⅰ. 개요
Ⅱ. 포로의 남북한시각차이
Ⅲ. 포로와 거제도 포로수용소
Ⅳ. 포로와 왕정시대 포로귀환
Ⅴ. 포로와 포로기
1. 북 이스라엘 멸망
2. 남유다의 멸망
참고문헌
Ⅱ. 포로의 남북한시각차이
Ⅲ. 포로와 거제도 포로수용소
Ⅳ. 포로와 왕정시대 포로귀환
Ⅴ. 포로와 포로기
1. 북 이스라엘 멸망
2. 남유다의 멸망
참고문헌
본문내용
많은 사회 개혁을 일으켜 포로기 이후 해이해진 사회 기강과 종교적 질서를 바로잡았다.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은 왕정이 몰락한 상황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공동체\'로서 강한 주체 의식을 갖고 역사를 개척해 나갔다.
Ⅴ. 포로와 포로기
1. 북 이스라엘 멸망
다윗시대에 애굽은 쇠퇴하였고 앗수르는 미약하였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양쪽 국경은 모두 허약한 민족들과 접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전 8세기 중엽 이후 앗시리아가 본격적인 제국 건설의 길로 접어들어 주전 745년경2 디글랏빌레셀 3세는 앗시리아의 왕위에 오르고 그는 작은 나라들3을 원정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고 정복한 모든 지역을 굴복시키기 위해 모든 주민들을 이동시키거나 추방시킨 다음 다른 사람들을 이주시켜 융화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는 주전 740년경에 시리아 북부를 합병시킴으로 이 일을 시작했고, 주전 738년경 다메섹이 쇠퇴한 후 북부 및 중부 수리아 국가인 하맛(hama)를 복속시키자 페니키아의 여러 해안도시들과 소아시아의 국가들, 그 밖의 수리아 국가들이 그에게 조공4을 받쳤다.
그러한 가운데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2세가 죽은 후 왕이 폭력에 의해서 바뀌고 5 내부적으로는 갖가지 음모들 이러한 현상은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의 예언에서 미루어 짐작6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야웨종교가 민족과 국가를 지탱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함에도 실상은 평등과 정의정신은 상실되어 찾아볼 수 없었고, 약육강식의 이교 종교의 문화가 이스라엘의 정신과 현실을 지배하고 있었고, 이러한 일에 왕이 앞장7섰다.
주전 734년경 디글랏빌레셀은 블레셋 족속의 고도인 가자를 정복하고, 에집트와 인접한 블레셋 족속의 국경선 외각에 기지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앗시리아의 정복정책은 주전 733년경 많은 소국가들의 폭동으로 이어졌고, 이에 앗시리아의 지원을 받던 브나헴의 아들 브가야가 베가 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반 앗시리아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주전 733년경 앗시리아는 상부 요르단 지역으로 쳐들어와서 이욘, 아벨-벳-마아가, 야뇨아, 케데스, 하솔, 길르앗, 갈릴래아, 그리고 납달리지역 전체를 점령하고,(왕하15:29) 백성을 사로잡아 앗시리아로 옮겨9갔다. 그래서 디글랏빌레셀은 북왕국의 영토를 3개지역10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베가는 호세아 반 엘라에게 살해당하고 디글랏빌레셀에게 조공을 바치고 그 후에 속국으로 재가 되었다. 주전 732년에 다메섹을 점령하고, 전영토를 앗시리아 속주로 재편하였고, 몇 년 후 디글랏빌레셀(745-727)이 죽자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726-722)가 왕위에 오르자 이스라엘 왕 호세아는 앗시리아 조공을 중단하고 지배를 벗어날 목적으로 이집트와 관계를 맺었다(왕하17:4) 이때가 주전 724년경이었고, 앗수르왕은 호세아를 사로잡고 땅을 점령하고(왕하17:4-6)사마리아 성읍만 3년을 저항하였을 뿐이었다. 살만에셀5세가 죽고 사르곤 왕이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 722-721년경에 사마리아는 멸망하여 앗시리아 영토에 편입되어 사마리아 속주가 되었다. 남북분단으로부터(922)멸망(722)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의 북이스라엘 역사는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2. 남유다의 멸망
북 이스라엘이 722년에 멸망할 당시의 남유다 왕은 아하스였다. 그는 즉위 초부터 북광국의 왕 베가와 시리아 왕 르신과 동맹을 맺고 반 앗시리아 정책을 시행하여 동참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자 이들 동맹군은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유다로 공격11을 하였다.(왕하 16:5) 여기서 존 브라이트의 재구성에 의하면, \"유다에게 복속되었던 에돔은 독립을 찾았고, 아하스의 군대를 엘랏으로부터
Ⅴ. 포로와 포로기
1. 북 이스라엘 멸망
다윗시대에 애굽은 쇠퇴하였고 앗수르는 미약하였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양쪽 국경은 모두 허약한 민족들과 접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전 8세기 중엽 이후 앗시리아가 본격적인 제국 건설의 길로 접어들어 주전 745년경2 디글랏빌레셀 3세는 앗시리아의 왕위에 오르고 그는 작은 나라들3을 원정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고 정복한 모든 지역을 굴복시키기 위해 모든 주민들을 이동시키거나 추방시킨 다음 다른 사람들을 이주시켜 융화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는 주전 740년경에 시리아 북부를 합병시킴으로 이 일을 시작했고, 주전 738년경 다메섹이 쇠퇴한 후 북부 및 중부 수리아 국가인 하맛(hama)를 복속시키자 페니키아의 여러 해안도시들과 소아시아의 국가들, 그 밖의 수리아 국가들이 그에게 조공4을 받쳤다.
그러한 가운데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2세가 죽은 후 왕이 폭력에 의해서 바뀌고 5 내부적으로는 갖가지 음모들 이러한 현상은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의 예언에서 미루어 짐작6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야웨종교가 민족과 국가를 지탱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함에도 실상은 평등과 정의정신은 상실되어 찾아볼 수 없었고, 약육강식의 이교 종교의 문화가 이스라엘의 정신과 현실을 지배하고 있었고, 이러한 일에 왕이 앞장7섰다.
주전 734년경 디글랏빌레셀은 블레셋 족속의 고도인 가자를 정복하고, 에집트와 인접한 블레셋 족속의 국경선 외각에 기지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앗시리아의 정복정책은 주전 733년경 많은 소국가들의 폭동으로 이어졌고, 이에 앗시리아의 지원을 받던 브나헴의 아들 브가야가 베가 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반 앗시리아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주전 733년경 앗시리아는 상부 요르단 지역으로 쳐들어와서 이욘, 아벨-벳-마아가, 야뇨아, 케데스, 하솔, 길르앗, 갈릴래아, 그리고 납달리지역 전체를 점령하고,(왕하15:29) 백성을 사로잡아 앗시리아로 옮겨9갔다. 그래서 디글랏빌레셀은 북왕국의 영토를 3개지역10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베가는 호세아 반 엘라에게 살해당하고 디글랏빌레셀에게 조공을 바치고 그 후에 속국으로 재가 되었다. 주전 732년에 다메섹을 점령하고, 전영토를 앗시리아 속주로 재편하였고, 몇 년 후 디글랏빌레셀(745-727)이 죽자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726-722)가 왕위에 오르자 이스라엘 왕 호세아는 앗시리아 조공을 중단하고 지배를 벗어날 목적으로 이집트와 관계를 맺었다(왕하17:4) 이때가 주전 724년경이었고, 앗수르왕은 호세아를 사로잡고 땅을 점령하고(왕하17:4-6)사마리아 성읍만 3년을 저항하였을 뿐이었다. 살만에셀5세가 죽고 사르곤 왕이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 722-721년경에 사마리아는 멸망하여 앗시리아 영토에 편입되어 사마리아 속주가 되었다. 남북분단으로부터(922)멸망(722)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의 북이스라엘 역사는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2. 남유다의 멸망
북 이스라엘이 722년에 멸망할 당시의 남유다 왕은 아하스였다. 그는 즉위 초부터 북광국의 왕 베가와 시리아 왕 르신과 동맹을 맺고 반 앗시리아 정책을 시행하여 동참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자 이들 동맹군은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유다로 공격11을 하였다.(왕하 16:5) 여기서 존 브라이트의 재구성에 의하면, \"유다에게 복속되었던 에돔은 독립을 찾았고, 아하스의 군대를 엘랏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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