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지역, 일본지방, 재일조선인사회]일본지역(일본지방)의 재일조선인사회, 일본지역(일본지방)의 조선인아나키즘운동, 일본지역(일본지방)의 조선인노동동맹회, 일본지역(일본지방)의 조선인아나키스트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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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지역, 일본지방, 재일조선인사회]일본지역(일본지방)의 재일조선인사회, 일본지역(일본지방)의 조선인아나키즘운동, 일본지역(일본지방)의 조선인노동동맹회, 일본지역(일본지방)의 조선인아나키스트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일본지역(일본지방)의 재일조선인사회

Ⅲ. 일본지역(일본지방)의 조선인아나키즘운동

Ⅳ. 일본지역(일본지방)의 조선인노동동맹회
1. 동경동맹회의 결성 배경
2. 대판동맹회의 결성 배경

Ⅴ. 일본지역(일본지방)의 조선인아나키스트

Ⅵ.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판을 거쳐 1926년 2월 26일부터 열린 공판 결과 3월 25일, 박열과 金子文子는 형법 제73조에 의거해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그날 오후에 열린 임시각의의 협의를 거친 후 무기징역의 특사를 받았다. 이들은 4월 5일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박열은 千葉형무소에, 金子文子는 宇都宮 형무소 도치키(檜木)지소에 각각 수용되었다.
이후 박열은 1945년 10월 27일 일본에 진주한 미군정의 ‘정치범 즉시 석방’에 관한 포고령에 의해 秋田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11월 26일, 토오쿄오로 돌아온 박열은 1946년 1월 20일에 열린 ‘新朝鮮建設同盟’ 창립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신조선건설동맹은 그해 가을에 우파단체를 통합하여 재일조선인거류민단으로 발족했는데, 여기에서 박열은 단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8월 15일 박열은 대한민국정부수립축전에 참석하기 위해 일시 귀국한 후 다시 도일했다가 1950년 4월초에 영주 귀국했다. 박열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 27일 장충동에서 납북되어 1974년 1월 18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직을 맡았다. 식민지 시대 수형기간을 제외한 박열의 일생은 합법단체와 비밀결사의 조직, 인쇄물을 통한 반일운동의 전개로 이어졌다.
1920년대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열사건은 무엇인가. 일본당국 발표에 의하면, 이 사건은 박열과 金子文子 등이 공모하여 황태자인 히로히토의 결혼식에 폭탄을 던져 황태자와 일본정부 고관을 암살하고자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사건의 개요를 보면 다음과 같다.
폭탄을 던져 일본고관을 살해하고자 하는 박열의 계획은 1921년부터 준비되었다. 이를 위해 박열은 1921년 11월경부터 일본 외항선원 杉本貞一을 통해 폭탄을 구하고자 했으나 구하지 못했다. 1922년 9월에 다시 金翰을 통해 폭탄을 입수하고자 했으나 이 계획도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1923년 5월 27일 불령사에 金重漢이 가입하자 박열은 가을에 황태자 결혼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김중한에게 폭탄을 구하는 일을 맡겼다. 그러나 김중한과 박열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박열의 거사계획은 김중한의 애인이자 불령사 회원인 新山初代를 통해 일본공안당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폭탄입수는 논의단계에서 좌절되었고, 박열 검거를 필두로 金子文子, 陸洪均, 崔圭悰, 金重漢, 徐東星, 정태성, 張祥重, 河一(일명 河世明), 徐相庚, 洪鎭祐, 한예상, 新山初代, 野口品二, 栗原一男, 小川茂 등 불령사 회원 16명이 9월 3일까지 모두 검거되었다. 이 가운데 1925년 11월에 예심이 종결되면서 박열과 金子文子만이 대역죄, 폭발물취체규칙위반의 죄명으로 송치되고 김중한을 제외한 나머지는 방면되었다. 예심이 진행되는 동안 박열의 거사계획을 일본공안당국에 알렸던 新山初代는 市谷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과 국내에서 지원이 잇달았다. 흑우회는 박열이 검거되자 정태성과 장상중이 박열을 위하여 물품을 차입하는 한편, 삼월회·일월회·학우회 등 재일조선인단체와 함께 기부금을 모금하여 박열과 金子文子의 한복 제작과 공판경비에 충당했다.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布施辰治는 사건이 공표되자 자진하여 변호계를 제출하고 공판에 임하는 한편, 변호사수임료를 거부함은 물론이고, 공판에 필요한 각종 비용 전부를 자비로 부담하였다.
박열사건은 폭탄의 준비과정에서 차질을 빚고, 정보가 누설되어 검거됨으로써 거사를 일으키기 전에 발각된 미수사건이다. 그러나 일본당국은 이 사건을 칸토오지진의 와중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대역사건으로 포장하고 무기징역이라는 중징계에 처했다. 박열은 1945년 10월 27일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 2일 동안이라는 긴 수형생활을 했다.
Ⅵ. 결론
개항 이후 외압에 의해 세계자본주의시장에 편입된 조선은 근대국민국가 수립이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이 과제는 일본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국권수호로, 그리고 다시 ‘독립’으로 대체되었다. 이후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일본의 침략에 대항해 국권을 회복하는 것은 해방을 맞을 때 까지 전 국민의 가장 큰 관심사이자 과제였다.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한 사람이든, 계몽사업에 헌신한 사람이든, 적당히 일제와 타협하면서 입신의 영달을 꾀한 사람이든, 친일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든, 민족운동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버거워 하던 사람이든, 풍족한 학자금으로 외국유학생활을 만끽하던 학생이든. 그 모두에게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그 누구에게라도 최소한 ‘독립’은 벗어버릴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일제하 한국 민중들이 늘 ‘독립’을 머릿속에 새기면서 생활한 것이 아니었다. 과수원에 놀러가서 땅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 먹었다고 7살 난 어린 딸자식의 허벅지 살 한 움큼을 일본인이 가위로 도려내었을 때, 東京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일자리를 얻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어제까지도 아무 일 없이 갈아먹던 땅이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을 때. 그럴 때 평소에 잊고 있던 ‘독립’을 떠 올리게 되는 것이다.
일제시대는 독립과 관련되어 다양한 방략과 수많은 소신과 주장이 있었다.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지금 와서 독립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이다’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 ‘독립이 된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은 없다’ 등등 독립을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는 이들 모두가 ‘독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좌파계열도 이 무리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의 방식대로, 소신과 주장을 가지고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참고문헌
권혁태(2007), 재일조선인과 한국사회 : 한국사회는 재일조선인을 어떻게 표상해왔는가, 한국역사연구회
김혜선(2009), 해방 직후 한국 아나키즘 운동의 양상과 지향, 인하대학교
김명섭(2003), 재일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의 노동운동, 문화체육관광부
나주현(2006), 1950년대 재일조선인 사회의 통일운동, 성균관대학교
오장환(1997), 1920년대 국내아나키즘운동 소고, 건국대학교사학회
정혜경(1998), 1920년대 일본지역 조선인노동동맹회 연구, 국학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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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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