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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정권, 페레스트로이카, 소련붕괴]고르바초프정권의 역사, 고르바초프정권의 사고, 고르바초프정권의 국상, 고르바초프정권의 경제개혁, 고르바초프정권의 페레스트로이카, 고르바초프정권의 소련붕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고르바초프정권의 역사

Ⅲ. 고르바초프정권의 사고

Ⅳ. 고르바초프정권의 국상

Ⅴ. 고르바초프정권의 경제개혁

Ⅵ. 고르바초프정권의 페레스트로이카

Ⅶ. 고르바초프정권의 소련붕괴
1. 개혁과 개방의 진통
2. 시장경제로의 전환
3. 민족문제의 심화
4. 옐친의 대두와 소련의 붕괴

참고문헌

본문내용

됐다.
1990년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전환점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다시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추진, 3월 인민대의원대회에서 ‘대통령제 도입, 공산당의 권력독점 포기와 다당제 도입, 사적 소유권 인정’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새 헌법 하에서 막강한 권한을 갖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 직속으로 대통령위원회가 구성되어 정부는 이제 당과 완전 분리됐다.
1990년 8월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하기 위한 종합기본계획에 합의했다. 시장경제의 채택은 페레스트로이카의 변질을 가져왔다. 사회주의의 재편을 목표로 출발한 페레스트로이카가 안팎의 긴장 속에서 ‘시장화’의 환상에 빠져들면서 자본주의 요소를 대폭 수용하고만 것이다. 1991년에 들어서는 경제의 ‘시장화’와 기업의 ‘사유화’가 무슨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양, 언론매체와 시위대의 중심 슬로건과 구호로 자리잡아갔다.
3. 민족문제의 심화
소련은 본래 120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였다. 인구의 약 절반이 러시아 인이고, 거기에 우크라이나 인과 벨로루시 인을 합친 슬라브계가 약 70%이다. 연방구성 15개 공화국은 원칙적으로 민족단위의 공화국이고, 연방구성 공화국들 안에도 20개의 민족 단위의 자치공화국이 있다. 그보다 더 작은 단위로 8개의 자치주, 10개의 민족관구가 있고, 별도 행정단위를 갖지 못한 민족도 많았다.
1989년 인민대의원회가 창설되고 각 공화국과 자치단체에서도 선거가 실시되면서 민족문제가 전연방 차원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가장 앞서나간 것은 서유럽과 동류의식이 강하고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오랫동안 분리, 반목한 경험을 갖고 있는 발트 연안 3개 공화국과 몰다비아, 그리고 전통적으로 독립의식이 강한 그루지야였다. 발트해 연안에서 1988년 가을 최초의 인민전선이 창설되었다. 대중시위를 통해 이들은 1940년 히틀러와 스탈린 간의 영토협정을 토대로 소련이 무력적으로 발트3국을 점령하였음을 환기시켰다. 히틀러와 스탈린간의 비밀협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수십 년간 부인해왔던 모스크바정부는 1989년 12월에 결국 이 협정이 존재했음을 시인하였다. 이는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가 소련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1990년 봄 드디어 이 나라들은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이 전례에 따라 다른 민족들도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사태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갔다. 소련이 점점 실체를 잃고 껍데기로 변해가는 가운데, 경제는 계속 악화되고 인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어갔다. 2월 19일 옐친 러시아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독재국가로 몰아가고 있다고 맹비난하면서, 마침내 고르바초프의 대통령직 사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후 옐친을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보수파의 맞불 작전이 전개되면서, 소련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안개 정국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4. 옐친의 대두와 소련의 붕괴
1991년 8월 18일 밤 8인으로 구성된 ‘비상사태위원회’가 현직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권한을 박탈함과 공시에 당시 크림지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그를 체포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대도시에 장갑차가 진주하였고, 비상사태위원회는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대중매체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였으며 연방행정기관에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쿠데타가 발생한 지 몇 시간 안돼서 옐친은 주저 없이 러시아 공화국의 통제권을 자신이 전면 장악한다고 선언하고 불법 쿠데타에 대한 시민항쟁과 총파업을 촉구했다. 8월 20일 오후, 주요 도시에서 총인원 80만이 참여하는 반쿠데타 집회와 시위가 전개됐다. 모스크바에서는 옐친, 레닌그라드에서는 시장 소브차크의 주도하에 각각 20만 규모의 쿠데타 규탄집회가 열렸다. 군대는 시위를 적극 봉쇄하지 않았고, 일부 병사들은 시위에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8월 23일 옐친은 러시아 공산당의 활동정지 명령을 내렸고, 24일 고르바초프는 소련공산당 서기장직을 사임하고 당 중앙위원회에 자진 해산을 요청했다. 이에 소련 공산당은 해산됐고 당의 자산은 국가에 몰수됐다. 쿠데타의 결행과 실패는 소련정국을 덮고 있던 안개를 깨끗이 걷어내고 옐친이 나아갈 길을 닦아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소비에트 연방의 사실상 해체와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은 시간문제였다.
소비에트 연방은 이제 종말을 향해 치달아갔다. 쿠데타 붕괴 후, 옐친은 고르바초프에게서 연방권력을 차례차례 빼앗으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갔다. 이제 슬라브족의 3개 핵심 공화국, 즉 러시아, 벨로루시 및 우크라이나는 연방 탈퇴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결국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했고, 각 공확국에 폭넓은 권능을 부여하는 내용의 신연방조약도 제안했다. 그러나 이미 중앙 정부의 권위는 회복될 수가 없었다.
슬라브계 세 공화국의 지도자가 벨로루시의 민스크에 모여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CIS) 협정에 조인하고 소비에트 연방의 소멸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가 위헌이라며 잠시 저항했으나, 그는 이제 아무런 힘이 없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크렘린을 떠났다. 크렘린의 깃대에서 소련의 적기가 내려지고, 백청적의 러시아 3색기가 내걸렸다. 그와 더불어 소비에트 연방구성 15개 공화국은 모두 독립국가가 됐고, 그중 11개국으로 유라시아 대륙 북부에 독립국가연합이 생겨났다. 이로써 소련은 10월 혁명 후 74년 만에 붕괴했고, 구소련 사람들은 국가의 보호막에서 나와 ‘생존경쟁’의 험난한 길로 들어섰다.
참고문헌
ⅰ. 김남섭,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와 냉전 체제의 종식, 한국역사연구회, 2011
ⅱ. 브라운 외 3명, 고르바초프의 모순, 국제학술원, 1991
ⅲ. 여강모, 고르바초프시대의 소련의 제3세계정책, 경북대학교환태평양연구소, 1992
ⅳ. 이용필, 레닌의 혁명과 고르바초프의 딜레마, 현대사회연구소, 1989
ⅴ. 지충남,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1991
ⅵ. 최태강, 고르바초프의 국내정책과 외교정책의 연계, 한국슬라브학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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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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