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징,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분야별 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침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좌익진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청년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병인의용대, 대한민국임시정부 신한독립당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징,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분야별 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침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좌익진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청년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병인의용대, 대한민국임시정부 신한독립당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징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분야별 활동
1. 외교활동
2. 홍보활동
3. 군사활동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침체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좌익진영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청년회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병인의용대
1. 결성과정
2. 조직체제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신한독립당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초 남경에서 창당되었다. 주요인물은 윤기섭신익희 등으로, 이들은 원래 한국독립당 소속이었으며, 창당 시 국민당정부기관에 재직 중인 한인과 ‘온건좌파’성향의 인물을 망라하였다. 이들은 ‘사상의 정화’와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표방하였으며, 기관지《우리 길》을 발간하였다. 1932년의 당원 수는 4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세가 미약하였기 때문에, 만주에서 이동해 온 재만 한국독립당과의 합당을 통해 존립기반 확보를 기도하였다.
한편 북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재만 한국독립당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관내지역 이동을 결정하고, 1933년 초 李圭彩와 吳光鮮組申肅과 金尙德組를 남경에 파견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국민당정부 및 중국민 반만항일세력의 지원획득, 관내지역 한인세력과의 연합 도모였다. 그리하여 이규채는 김구로부터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남경이동 경비를 지원받았고, 신숙은 한국혁명당 간부 윤기섭신익희와 양당의 합당에 합의하였다. 양당은 재만 한국독립당의 남경이동 이후, 1934년 2월 신한독립당으로의 합당을 선언하였다.
신한독립당은 중앙집권제의 민주공화국 건설을 표방하며,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 등을 당강으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민중의 조직화와 대중투쟁의 병행 등을 독립운동 방략으로 설정하였다. 당의 조직으로는 全黨大會支黨大會分黨大會, 중앙집행위원회지당집행위원회, 중앙감사위원회지당감사위원회 등을 두었다.
신한독립당의 출범은 만주와 관내지역 독립운동 세력의 연합을 뜻하였다. 통합을 통해 양당은 취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열 재정비를 과시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신한독립당은 민족혁명당 창당 작업의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여, 의열단과 주도권을 다툴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Ⅸ. 결론
1927년 3월 제3차 개헌을 통해 채택된 국무위원회제는 1940년까지 임정의 지도체제로 운영되었다. 국무령제하에서 내각 구성이 이루어지 않은 극복방안으로 채택된 국무위원회제는 임시의정원이 임정의 최고권력으로 부상하여 형식상 임시정부의 ‘행정부’인 국무위원회의 권한이 축소된 반면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해 임정의 유지를 위한 자구책의 성격을 띠었다.
임시정부 지도체제의 개편이 주요한 목적이었던 대한민국임시약헌은 민족운동전선에서 제기된 민족유일당운동을 수용하여 독립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완성될 때에는 국가의 최고권력이 이 당에 있고 임시헌법의 개정도 위임한다는 조항을 삽입하여 임시의정원의 해산을 명시했다. 그러나 임시약헌이 명시한 이 조항들은 임시의정원이 가진 임무권한이 당으로 이관되는 것이었고, 임시정부를 그 역할과 기능에서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존속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임정이 수용한 이당치국론은 임정을 독립운동의 총지도기관으로 설정한 점에서 ‘혁명정당론’에 바탕한 민족유일당운동과는 그 목적이 달랐고, 이러한 차이는 임정이 민족유일당운동을 적극 수용하지 못한 요인이 되었다.
상해시기 임정의 국무위원회제 내각은 두 차례 구성되었다. 임시의정원에서 선출된 제1차 국무위원들이 상해촉성회에 참여하여 실질적 내각이 임시약헌이 공포된 이후 5개월이 지난 1927년 8월에야 구성되었다. 제1차 국무위원과 임정 관계인사들은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지만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가 사회주의세력들이 주도해가고 임정을 중심으로 한 이당치국론이 수용되지 않자 민족유일당운동에서 이탈했다. 이후 임정 인사들은 민족주의계열을 중심으로 임정의 기초적 정당으로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을 조직했다.
상해시기 임정의 국무위원은 수도 많지 않았지만(제28조 국무위원은 5인 이상 11인으로 함) 김구이동녕계에 의해 주도되었고 세입세출 결산서를 검사한 것 외에는 별다른 활동도 보이지 않았다. 이 시기 임정의 국무위원회는 임정존폐문제와 지향이념의 차이 등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을 적극 추진하지 못했다.
윤봉길의거 이후 이동시기에 접어든 임정은 ‘항주사건’을 계기로 국무위원들이 총사퇴하여 임정은 무정부상태에 빠졌다. 이후 김구이동녕계는 임정에서 이탈했고 제3차 국무위원 정기개각을 통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 등의 민족주의계열의 연립내각이 구성되었다. 연립내각은 독립운동방략을 발표하면서 임시의정원의 역할과 기능을 단일당이 대신할수 있다는 포고를 발표했다. 그러나 임정존폐문제로 송병조차이석을 제외한 국무위원이 사퇴하여 임정은 다시 무정부상태에 빠졌다.
1935년 10월 김구이동녕 등이 국무위원으로 보선되면서 임정중심의 통일책을 천명하고 임정의 여당으로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1937년 8월에는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재건 한국독립당이 중심이 되어 임정의 지지단체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다. 이후 김구이동녕 중심의 국무위원회는 임정의 선전활동에 주력했지만 독립운동방략의 구체적 진행방침은 마련하지 못했다.
중일전쟁 직후 국무위원회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1939년에는 군사특파원을 서안으로 파견하는 한편 10월 임시의정원회의에서 한국국민당을 축으로 재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이 참여하는 민족주의계열 정당의 연립내각이 조직되었다. 국무위원회는 1939년 11월에는 조직군사외교 등 5개 항목의 독립운동방략을 발표했다. 이 독립운동 방침에 따라 1940년 5월 민족주의계열의 3당은 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되고 9월에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이로써 국무위원회 내각은 민족주의계열의 통합을 계기로 전시체제로 개편되었다.
중경시기 국무위원회제의 전시체제 확립은 제4차 주석제 임시헌법 개정에 반영되어 1942년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고 1944년에는 임시정부를 통일전선정부로 확대강화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김지암(2007)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적 노력과 공헌,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신상준(1987)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변천과 통치조직, 대구대학교평화통일연구소
오세종(1991)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가건설론, 계명대학교
이연복(2005)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적 위상,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조항래(1997) /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정치이념과 정통성 계승에 관한 연구, 삼균학회
조동걸(1982)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과 변천, 건국대학교
  • 가격6,5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3.07.24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6539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