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북한정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형성배경
1. 해방직후 북한의 정치상황
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설치
Ⅲ. 북한정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과정
1. 전시 연합국회담에서 소련이 한반도에 대해 보인 태도
2. 소련의 북한진공과 한반도의 분단
1) 미국의 결정과 소련의 입장
2) 미국의 해명
3. 소련군의 진주와 초기 점령작전
1) 소련군의 진주와 점령국의 수뇌부
2) 소련 점령군의 초기의 실수들
3) 토착 한인지도자들과 소련의 점령지역 통치유형
4) 순수형 연립단계
4. 사이비형 연립의 단계와 소련의 점령정책
1)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소련의 태도
2) 사이비형 연합의 추진
5. 단일주적 정권의 단계와 소련의 점령정책
Ⅳ. 북한정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산화
Ⅴ. 북한정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전전략
1. 북한의 핵문제와 남북관계
2. 김일성‘평화전략’-‘민족대단결’
Ⅵ. 결론
참고문헌
Ⅱ. 북한정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형성배경
1. 해방직후 북한의 정치상황
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설치
Ⅲ. 북한정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과정
1. 전시 연합국회담에서 소련이 한반도에 대해 보인 태도
2. 소련의 북한진공과 한반도의 분단
1) 미국의 결정과 소련의 입장
2) 미국의 해명
3. 소련군의 진주와 초기 점령작전
1) 소련군의 진주와 점령국의 수뇌부
2) 소련 점령군의 초기의 실수들
3) 토착 한인지도자들과 소련의 점령지역 통치유형
4) 순수형 연립단계
4. 사이비형 연립의 단계와 소련의 점령정책
1)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소련의 태도
2) 사이비형 연합의 추진
5. 단일주적 정권의 단계와 소련의 점령정책
Ⅳ. 북한정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산화
Ⅴ. 북한정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전전략
1. 북한의 핵문제와 남북관계
2. 김일성‘평화전략’-‘민족대단결’
Ⅵ.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민족’과 ‘통일’이라는 지상명제를 내세워서 첫째로 긴장된 내부 불만을 억제, 체제결속을 꾀하고 다지자. 둘째 재외적으로는 자기들을 애국애족 및 통일 세력으로 분장하고 반면에 한국정부를 반민족반통일세력으로 매도하여 ‘정통성’을 확보하자. 셋째 남한 내에 ‘민족’,‘통일’ 지상주의적 여론을 조성하여 연공연북 ‘통일전선’을 형성하자. 넷째 북한이 당면한 핵문제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모면하기 위해 자신의 평화적 이미지를 대내외에 부각시켜 국내외여론을 오도하자. 는 등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목표는 대남공세에 있으며 그 공세의 핵심은 역시 ‘통일전선’에 있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Ⅵ. 결론
김일성 그가 대중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45년 10월 14일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 대회에서의 일이다. 그가 귀국했을 때는 만 33세의 청년이었다. 본래 만주에서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한 항일 투사들이 여러 사람 있었다. 그러한 이유도 참작하여 김일성은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열렬히 환영을 받았다. 그 후부터 그는 항일 유격대의 영웅으로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의 만주에서의 활동을 접어두고,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 소련 망명생활에 관한 경력을 살펴보면 김일성은 그들의 빨치산 부대와 같이 소련으로 피신한후 그곳 소련군 극동 정찰국의 제 88특별여단이란 이름의 부대에 편성되게된다. 그중 1대대장을 맡게되며 그런 정도의 경력을 가진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대중 집회에 데뷔한 직후부터 소련군 사령부는 매스 미디어들을 총동원하여 ‘민족적 영웅’이요, ‘영명한 지도자’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헌시, 노래, 춤, 연극, 국호, 투쟁기 등으로 구가했다.
소련의 계획은 김일성 ‘장군’을 북한의 지도자로 육성하는 것이었다. 해방된 한반도에서 믿을 만한 공산주의 지도자를 찾아내기 어려웠던 소련은 이 33세의 김일성을 택하여 그의 카리스마적 지위를 인위적으로 구축할 것을 계획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영도자로 지명했다는 것은, 45년 10월 10 -13일 극비리에 개최되었던 조선공산당 서북 5도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 그가 참석하여 강령적 연설을 한 사실을 고려할 때 확신할 수 있다. 그는 아직 대중 앞에 데뷔하기 전날인 10월 13일, 이 비밀회의에 참석, “새조선건설과 민족 통일 전략에 대하여” 지도자의 고자세에서 노했다. 그가 중요한 당 비밀 회의에 참석하여 강령적인 정부연설을 했다는 사실은 그의 당 영도자로서의 지위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는 것의 입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여러 가지 사항에 비추어 김일성의 역설한 조선공산당 서북 5도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서 토의된 내용의 중요한 사항인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창설은 북한에다 서울과는 별개의 공산당을 조직하여 김일성으로 하여금 그 지도권을 장악하게 하려는 소련군 사령부의 의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추측이 충분히 들게 한다.
한편 서울의 당 중앙을 지지하던 오기섭, 정달헌등 국내파는 북조선 분국의 설치가 당의 분열을 초래한다는 이유에서 끈질긴 저항을 시도해 보았으나, 소련군 사령부의 분국설치 계획은 부동한 것이었다. 그 후 이들 국내파는 김일성에 의해 단계적으로 소탕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분국 설치를 둘러싸고 당이 분열되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당 책임비서에는 김용범(소련 맹종파), 제 2비서에는 오기섭(국내파)과 무정(연안파)이 선임되었다. 대회가 “조선 무산 계급의 영도자 박헌영동지”에게 보내는 축전까지 채택한 것을 보면 당시 박헌영의 북한내 권위를 엿볼 수 있다.
김일성은 아직도 당 지도부밖에 있었으나,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은 오늘의 조선 로동당의 모체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모체를 만들어낸 조선공산당 서북 5도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의 소집일, 즉 45년 10월 10일을 조선로동당 창당일로 정하고 성대히 기념하고 있다)
45년 12월 17-18일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제3차 확대 집행위원회가 열렸다. 여기서 김일성은 드디어 당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이제 그는 이데올로기, 조직, 규율면에서의 지배권을 차지한 것이다. 이 위원회에서 그는 “북부 조선 당 공작의 착오와 결점에 대하여”라는 서릿발 같은 보고를 통해 수다한 당간부를 비판한다. 위원회는 그의 보고에 따라 북부 조선 당 공작의 착오와 결점에 대한 ‘결정’을 채택했다. ‘결정’은 “해방 직후부터 3개월 동안에 본당원 수는 7,000명까지 장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다. 그러나 이 소수가 전 북한 사회를 지배하는 스탈린주의 체제의 하수인집단을 구성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자기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숙당투쟁을 벌였다. 북조선 분국이 창설된 지 겨우 2개월 뒤의 일이었다. 그의 잠재적 정적이라고 할 현준혁은 이미 45년 9월 하순 백주 대로상에서 피살되고 없었다. 오기섭과 무정은 46년 1월과 7월에 각각 당 제2비서직에서 밀려났다. 김일성 독재 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일성의 당권 장악과 더불어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이란 이름은 어느새 소멸되고, 북조선 공산당이란 이름이 이에 대치되었다. 김일성이 당 책임 비서가 되면서 발언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된 민주주의의 독립국가를 실현하기위해 북한에다 ‘민주기지’를 창성할 것을 선언한 부분이다. 민주기지는 전국의 공산주의화 기지를 의미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이러한 민주 기지 전략은 새로운 것도 독창적인 것도 아니었다. 1국(國) 또는 1지역에다 강력한 공산주의의 기지를 구축한 후, 이것을 거점으로 하여 혁명을 모든 가능한 곳으로 수출한다는 것은 10월 혁명이래의 스탈린의 공식적 방법이었다.
참고문헌
민진(1999), 북한의 정부 기능에 관한 연구, 국방정신교육원
심익섭(2002), 북한 정부론, 백산자료원
양동안(1989), 남·북한 정부수립과정 비교연구, 현대사회연구소
양문수, 김병연(2012), 북한 경제에서의 시장과 정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이수혁(2011), 북한은 현실이다, 21세기북스
홍승원(1992), 북한의 정부관료제에 관한 연구, 경남대학교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민족’과 ‘통일’이라는 지상명제를 내세워서 첫째로 긴장된 내부 불만을 억제, 체제결속을 꾀하고 다지자. 둘째 재외적으로는 자기들을 애국애족 및 통일 세력으로 분장하고 반면에 한국정부를 반민족반통일세력으로 매도하여 ‘정통성’을 확보하자. 셋째 남한 내에 ‘민족’,‘통일’ 지상주의적 여론을 조성하여 연공연북 ‘통일전선’을 형성하자. 넷째 북한이 당면한 핵문제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모면하기 위해 자신의 평화적 이미지를 대내외에 부각시켜 국내외여론을 오도하자. 는 등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목표는 대남공세에 있으며 그 공세의 핵심은 역시 ‘통일전선’에 있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Ⅵ. 결론
김일성 그가 대중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45년 10월 14일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 대회에서의 일이다. 그가 귀국했을 때는 만 33세의 청년이었다. 본래 만주에서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한 항일 투사들이 여러 사람 있었다. 그러한 이유도 참작하여 김일성은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열렬히 환영을 받았다. 그 후부터 그는 항일 유격대의 영웅으로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의 만주에서의 활동을 접어두고,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 소련 망명생활에 관한 경력을 살펴보면 김일성은 그들의 빨치산 부대와 같이 소련으로 피신한후 그곳 소련군 극동 정찰국의 제 88특별여단이란 이름의 부대에 편성되게된다. 그중 1대대장을 맡게되며 그런 정도의 경력을 가진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대중 집회에 데뷔한 직후부터 소련군 사령부는 매스 미디어들을 총동원하여 ‘민족적 영웅’이요, ‘영명한 지도자’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헌시, 노래, 춤, 연극, 국호, 투쟁기 등으로 구가했다.
소련의 계획은 김일성 ‘장군’을 북한의 지도자로 육성하는 것이었다. 해방된 한반도에서 믿을 만한 공산주의 지도자를 찾아내기 어려웠던 소련은 이 33세의 김일성을 택하여 그의 카리스마적 지위를 인위적으로 구축할 것을 계획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영도자로 지명했다는 것은, 45년 10월 10 -13일 극비리에 개최되었던 조선공산당 서북 5도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 그가 참석하여 강령적 연설을 한 사실을 고려할 때 확신할 수 있다. 그는 아직 대중 앞에 데뷔하기 전날인 10월 13일, 이 비밀회의에 참석, “새조선건설과 민족 통일 전략에 대하여” 지도자의 고자세에서 노했다. 그가 중요한 당 비밀 회의에 참석하여 강령적인 정부연설을 했다는 사실은 그의 당 영도자로서의 지위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는 것의 입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여러 가지 사항에 비추어 김일성의 역설한 조선공산당 서북 5도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서 토의된 내용의 중요한 사항인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창설은 북한에다 서울과는 별개의 공산당을 조직하여 김일성으로 하여금 그 지도권을 장악하게 하려는 소련군 사령부의 의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추측이 충분히 들게 한다.
한편 서울의 당 중앙을 지지하던 오기섭, 정달헌등 국내파는 북조선 분국의 설치가 당의 분열을 초래한다는 이유에서 끈질긴 저항을 시도해 보았으나, 소련군 사령부의 분국설치 계획은 부동한 것이었다. 그 후 이들 국내파는 김일성에 의해 단계적으로 소탕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분국 설치를 둘러싸고 당이 분열되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당 책임비서에는 김용범(소련 맹종파), 제 2비서에는 오기섭(국내파)과 무정(연안파)이 선임되었다. 대회가 “조선 무산 계급의 영도자 박헌영동지”에게 보내는 축전까지 채택한 것을 보면 당시 박헌영의 북한내 권위를 엿볼 수 있다.
김일성은 아직도 당 지도부밖에 있었으나,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은 오늘의 조선 로동당의 모체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모체를 만들어낸 조선공산당 서북 5도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의 소집일, 즉 45년 10월 10일을 조선로동당 창당일로 정하고 성대히 기념하고 있다)
45년 12월 17-18일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제3차 확대 집행위원회가 열렸다. 여기서 김일성은 드디어 당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이제 그는 이데올로기, 조직, 규율면에서의 지배권을 차지한 것이다. 이 위원회에서 그는 “북부 조선 당 공작의 착오와 결점에 대하여”라는 서릿발 같은 보고를 통해 수다한 당간부를 비판한다. 위원회는 그의 보고에 따라 북부 조선 당 공작의 착오와 결점에 대한 ‘결정’을 채택했다. ‘결정’은 “해방 직후부터 3개월 동안에 본당원 수는 7,000명까지 장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다. 그러나 이 소수가 전 북한 사회를 지배하는 스탈린주의 체제의 하수인집단을 구성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자기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숙당투쟁을 벌였다. 북조선 분국이 창설된 지 겨우 2개월 뒤의 일이었다. 그의 잠재적 정적이라고 할 현준혁은 이미 45년 9월 하순 백주 대로상에서 피살되고 없었다. 오기섭과 무정은 46년 1월과 7월에 각각 당 제2비서직에서 밀려났다. 김일성 독재 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일성의 당권 장악과 더불어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이란 이름은 어느새 소멸되고, 북조선 공산당이란 이름이 이에 대치되었다. 김일성이 당 책임 비서가 되면서 발언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된 민주주의의 독립국가를 실현하기위해 북한에다 ‘민주기지’를 창성할 것을 선언한 부분이다. 민주기지는 전국의 공산주의화 기지를 의미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이러한 민주 기지 전략은 새로운 것도 독창적인 것도 아니었다. 1국(國) 또는 1지역에다 강력한 공산주의의 기지를 구축한 후, 이것을 거점으로 하여 혁명을 모든 가능한 곳으로 수출한다는 것은 10월 혁명이래의 스탈린의 공식적 방법이었다.
참고문헌
민진(1999), 북한의 정부 기능에 관한 연구, 국방정신교육원
심익섭(2002), 북한 정부론, 백산자료원
양동안(1989), 남·북한 정부수립과정 비교연구, 현대사회연구소
양문수, 김병연(2012), 북한 경제에서의 시장과 정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이수혁(2011), 북한은 현실이다, 21세기북스
홍승원(1992), 북한의 정부관료제에 관한 연구, 경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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