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제정러시아(러시아제국)의 역사
Ⅲ. 제정러시아(러시아제국)의 공동체의식
Ⅳ. 제정러시아(러시아제국)의 나폴레옹침공
Ⅴ. 제정러시아(러시아제국)의 대한반도정책
Ⅵ. 제정러시아(러시아제국)의 한러밀약설(한국과 러시아의 밀약설)
1. 한․러 밀약설의 배경 :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
2. 한․러 밀약과 청의 의도
1) 조선 - 러시아
2) 청의 의도
3.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의도
1) 1880년대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의도
2) 러시아의 의도
4. 한․러 밀약설의 내용
1) 1차 한․러 밀약설(1885년 6월 16일) - 협판교섭통상
2) 2차 한․러 밀약설(1886년 8월 9일)
3) 3차 한․러 밀약설(1888년 7월 13일) - 한․러육로통상장정 조인
Ⅶ. 제정러시아(러시아제국)의 한인이주
Ⅷ. 제정러시아(러시아제국)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Ⅸ. 결론
참고문헌
Ⅱ. 제정러시아(러시아제국)의 역사
Ⅲ. 제정러시아(러시아제국)의 공동체의식
Ⅳ. 제정러시아(러시아제국)의 나폴레옹침공
Ⅴ. 제정러시아(러시아제국)의 대한반도정책
Ⅵ. 제정러시아(러시아제국)의 한러밀약설(한국과 러시아의 밀약설)
1. 한․러 밀약설의 배경 :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
2. 한․러 밀약과 청의 의도
1) 조선 - 러시아
2) 청의 의도
3.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의도
1) 1880년대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의도
2) 러시아의 의도
4. 한․러 밀약설의 내용
1) 1차 한․러 밀약설(1885년 6월 16일) - 협판교섭통상
2) 2차 한․러 밀약설(1886년 8월 9일)
3) 3차 한․러 밀약설(1888년 7월 13일) - 한․러육로통상장정 조인
Ⅶ. 제정러시아(러시아제국)의 한인이주
Ⅷ. 제정러시아(러시아제국)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경 이외는 그다지 큰 요소가 없었고 러시아 군사들도 점령군이라기보다는 보호인으로 간주되면서 자연스럽게 이 지역이 러시아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관련되는 연해주 지역으로 러시아가 진출하게 된 것은 1858년과 1860년 淸國과 맺은 아이훈 조약과 북경조약에서 비롯되었다. 연해주 지역은 당시 淸國의 지배력이 매우 약했던 곳이었으며, 그리 많지 않은 러시아의 군대로도 쉽게 점령될 수 있었다. 러시아로서는 크림전쟁(1853-1856)의 패배결과 실추된 국가적 위신을 회복하고 부동항 획득의 꿈을 동아시아 지역에서 단번에 실현한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문제는 러시아인 거주민이 많지 않았던 이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철도를 건설하여 러시아의 심장부와 단시일 내에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철도건설의 필요성에 관한 문제제기는 연해주 지역을 탐사하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트 페테르부르그로 귀환한 포시에트(Konstantin Nikolaevich Posyet: 1819-1899)에 의해서 1874년에 처음으로 이루어 졌다. 1874년부터 1888년까지 교통부 장관을 역임한 포시에트는 극동 지역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이 지역에 대한 개발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Ⅸ. 결론
러시아에서 정치는 쇼에, 그리고 예술은 삶에 가까운 듯 보인다. 러시아 인들이 예술을 선호하는 것은 예술이 보여주는 진지함 때문일까? 생일이나 기일을 꼬박 꼬박 챙기는 러시아이지만 대통령의 생일 따위에는 다들 별 관심이 없다. 표트르 대제, 레닌, 스탈린 등은 생전에 러시아의 역사를 좌지우지했으나 현재 그들의 생일이나 기일은 기껏해야 극소수 관심 있는 사람들의 소일거리일 따름이다. 러시아에서 전 국민의 관심을 끌려면 문화 예술인이 되는 게 지름길이다.
1999년 전 러시아는 태어난 지 이백년이 된 푸시킨의 생일을 대대적으로 축하했다. 푸시킨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각종 학회가 푸시킨과 관련 있는 지역 곳곳에서 열리고 여러 극장들에서는 푸시킨의 오페라와 발레, 연극을 속속들이 올렸다. 영국에는 셰익스피어가 있고 독일에는 괴테가 있듯이 러시아에는 푸시킨이 있다. 이들은 아직까지도 푸시킨을 최고의 작가로 칭송하며 자신들의 스승으로, 벗으로, 애인으로, 정신적인 지주로 삼는다. 그것은 푸시킨이 남긴 시와 소설, 편지들이 러시아 인들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그들이 꿈꾸는 이상에 대해 빛을 비추는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푸시킨이 19세기부터 현재까지 러시아인들의 가장 큰 별이라는 데는 그다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꼭 200주년이나 150주년 같은 기념식이 아니라 해도 언제나 푸시킨의 무덤이나 푸시킨의 동상에는 꽃이 끊길 날이 없으며 크고 작은 기념 행사가 문화, 예술계를 채운다.
20세기 문화계에서 가장 주목할 인물의 하나는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소비에트 문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 인물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바르드 가수이다. 바르드 가수 들은 기타 한 대를 들고 자신이 지은 시를 노래하는 음유 시인들이다. 비소츠키는 전체주의, 집단주의 체제 속에서 쉽게 표출해 내보일 수 없었던 개인의 서정, 감정, 사회에 대한 울분 등을 시에 담아 자유롭게 노래했다.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을 아무런 가식 없이 내보인다는 것 자체는 소비에트 체제의 시각에서는 아주 위험한 이적 행위였으나 국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용기였다. 우리나라에서 비소츠키는 영화 백야로 알려져 있다. 비소츠키의 낮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텅 빈 무대에서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장면에서 관객은 이 가수가 러시아인들이 어두운 삶 속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노래하고 있음을 가늠할 수 있다. 비소츠키는 가수로서, 또 연기자로서 명실공히 20세기 최고의 스타였으며 러시아 사람들이 그에게 기울이는 관심과 사랑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어느 나라에서나 정치인보다는 문화, 예술계 인사를 스타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청문회 스타로서 노무현이 누렸던 인기는 당대 어떤 가수에 못지않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러시아에서 푸시킨과 비소츠키를 찬미한다거나 옐친 대통령의 탄핵 검토 대신 알라 푸가쵸바의 생일 기념식을 치루는 사실을 근거로 러시아에서 예술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러시아에서 예술은 언제나 예술 이상이었다는 점이다. 기술적 완성도를 추구하고 창조물에 외적, 내적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것 이외에 러시아의 예술가들은, 그리고 그 수용자들은 그 이상의 것을 예술에서 찾았다. 예술은 감정의 그릇일 뿐 아니라 윤리의 도구였으며 종교적 진리를 설파하는 수단이었다. 인간의 창조, 가치 평가, 객관적 진리의 발견,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 예술은 러시아 문화에서 다른 어느 나라에 못지않게,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은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최초의 사건인 정교의 수용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키예프 루시의 대공인 블라지미르는 988년 정교를 수용했다. 이슬람이나 카톨릭 등 당시 강세였던 다른 종교들을 놔두고 러시아는 왜 정교를 택했을까? 우선 카톨릭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교황의 권력이 정치적 수장의 권력을 압도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이슬람의 경우 아내를 많이 둘 수 있는 점에서 상당히 높은 점수를 땄으나 돼지고기와 술을 금한다는 원칙은 먹고 마시기 좋아하는 러시아 인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정교의 수용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김지환(2004), 제정 러시아의 제국주의와 동방정책의 역사적 고찰, 한국중국학회
김재섭(1994), 제정 러시아의 대한반도정책 연구, 경성대학교
유·게·스메르틴 외 1명(2009), 제정 러시아 시대의 한국학 연구와 교육의 연관성, 한국교육학회
한정숙(1996), 제정러시아 제국주의의 만주·조선정책, 한국역사연구회
황영삼(2000), 시베리아 철도부설과 제정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 한국외국어대학교러시아연구소
M.카르포비치 저, 이인호 역(1983), 제정러시아, 탐구당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관련되는 연해주 지역으로 러시아가 진출하게 된 것은 1858년과 1860년 淸國과 맺은 아이훈 조약과 북경조약에서 비롯되었다. 연해주 지역은 당시 淸國의 지배력이 매우 약했던 곳이었으며, 그리 많지 않은 러시아의 군대로도 쉽게 점령될 수 있었다. 러시아로서는 크림전쟁(1853-1856)의 패배결과 실추된 국가적 위신을 회복하고 부동항 획득의 꿈을 동아시아 지역에서 단번에 실현한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문제는 러시아인 거주민이 많지 않았던 이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철도를 건설하여 러시아의 심장부와 단시일 내에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철도건설의 필요성에 관한 문제제기는 연해주 지역을 탐사하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트 페테르부르그로 귀환한 포시에트(Konstantin Nikolaevich Posyet: 1819-1899)에 의해서 1874년에 처음으로 이루어 졌다. 1874년부터 1888년까지 교통부 장관을 역임한 포시에트는 극동 지역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이 지역에 대한 개발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Ⅸ. 결론
러시아에서 정치는 쇼에, 그리고 예술은 삶에 가까운 듯 보인다. 러시아 인들이 예술을 선호하는 것은 예술이 보여주는 진지함 때문일까? 생일이나 기일을 꼬박 꼬박 챙기는 러시아이지만 대통령의 생일 따위에는 다들 별 관심이 없다. 표트르 대제, 레닌, 스탈린 등은 생전에 러시아의 역사를 좌지우지했으나 현재 그들의 생일이나 기일은 기껏해야 극소수 관심 있는 사람들의 소일거리일 따름이다. 러시아에서 전 국민의 관심을 끌려면 문화 예술인이 되는 게 지름길이다.
1999년 전 러시아는 태어난 지 이백년이 된 푸시킨의 생일을 대대적으로 축하했다. 푸시킨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각종 학회가 푸시킨과 관련 있는 지역 곳곳에서 열리고 여러 극장들에서는 푸시킨의 오페라와 발레, 연극을 속속들이 올렸다. 영국에는 셰익스피어가 있고 독일에는 괴테가 있듯이 러시아에는 푸시킨이 있다. 이들은 아직까지도 푸시킨을 최고의 작가로 칭송하며 자신들의 스승으로, 벗으로, 애인으로, 정신적인 지주로 삼는다. 그것은 푸시킨이 남긴 시와 소설, 편지들이 러시아 인들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그들이 꿈꾸는 이상에 대해 빛을 비추는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푸시킨이 19세기부터 현재까지 러시아인들의 가장 큰 별이라는 데는 그다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꼭 200주년이나 150주년 같은 기념식이 아니라 해도 언제나 푸시킨의 무덤이나 푸시킨의 동상에는 꽃이 끊길 날이 없으며 크고 작은 기념 행사가 문화, 예술계를 채운다.
20세기 문화계에서 가장 주목할 인물의 하나는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소비에트 문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 인물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바르드 가수이다. 바르드 가수 들은 기타 한 대를 들고 자신이 지은 시를 노래하는 음유 시인들이다. 비소츠키는 전체주의, 집단주의 체제 속에서 쉽게 표출해 내보일 수 없었던 개인의 서정, 감정, 사회에 대한 울분 등을 시에 담아 자유롭게 노래했다.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을 아무런 가식 없이 내보인다는 것 자체는 소비에트 체제의 시각에서는 아주 위험한 이적 행위였으나 국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용기였다. 우리나라에서 비소츠키는 영화 백야로 알려져 있다. 비소츠키의 낮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텅 빈 무대에서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장면에서 관객은 이 가수가 러시아인들이 어두운 삶 속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노래하고 있음을 가늠할 수 있다. 비소츠키는 가수로서, 또 연기자로서 명실공히 20세기 최고의 스타였으며 러시아 사람들이 그에게 기울이는 관심과 사랑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어느 나라에서나 정치인보다는 문화, 예술계 인사를 스타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청문회 스타로서 노무현이 누렸던 인기는 당대 어떤 가수에 못지않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러시아에서 푸시킨과 비소츠키를 찬미한다거나 옐친 대통령의 탄핵 검토 대신 알라 푸가쵸바의 생일 기념식을 치루는 사실을 근거로 러시아에서 예술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러시아에서 예술은 언제나 예술 이상이었다는 점이다. 기술적 완성도를 추구하고 창조물에 외적, 내적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것 이외에 러시아의 예술가들은, 그리고 그 수용자들은 그 이상의 것을 예술에서 찾았다. 예술은 감정의 그릇일 뿐 아니라 윤리의 도구였으며 종교적 진리를 설파하는 수단이었다. 인간의 창조, 가치 평가, 객관적 진리의 발견,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 예술은 러시아 문화에서 다른 어느 나라에 못지않게,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은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최초의 사건인 정교의 수용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키예프 루시의 대공인 블라지미르는 988년 정교를 수용했다. 이슬람이나 카톨릭 등 당시 강세였던 다른 종교들을 놔두고 러시아는 왜 정교를 택했을까? 우선 카톨릭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교황의 권력이 정치적 수장의 권력을 압도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이슬람의 경우 아내를 많이 둘 수 있는 점에서 상당히 높은 점수를 땄으나 돼지고기와 술을 금한다는 원칙은 먹고 마시기 좋아하는 러시아 인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정교의 수용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김지환(2004), 제정 러시아의 제국주의와 동방정책의 역사적 고찰, 한국중국학회
김재섭(1994), 제정 러시아의 대한반도정책 연구, 경성대학교
유·게·스메르틴 외 1명(2009), 제정 러시아 시대의 한국학 연구와 교육의 연관성, 한국교육학회
한정숙(1996), 제정러시아 제국주의의 만주·조선정책, 한국역사연구회
황영삼(2000), 시베리아 철도부설과 제정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 한국외국어대학교러시아연구소
M.카르포비치 저, 이인호 역(1983), 제정러시아, 탐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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