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공습]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배경,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주체,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원인,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전개과정,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미일교섭(미국과 일본의 교섭)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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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진주만공습]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배경,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주체,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원인,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전개과정,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미일교섭(미국과 일본의 교섭)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배경과 주체
1. 미국이 바라본 일본
1) 대일 유화정책
2) 루즈벨트 대통령
3) 코델 헐
2. 일본이 바라본 미국
1) 대동아 공영권 구상
2) 고노에 수상
3) 야마모토 이소로꾸

Ⅲ.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원인

Ⅳ.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전개과정

Ⅴ.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미일교섭(미국과 일본의 교섭)

참고문헌

본문내용

만의 하늘에서는 제 1파 공격에 이어 즈이가꾸에서 발진한 제 2파 공격이 개시되고 있었다. 이제 제 1파 공격을 당하기 전에 당당하게 떠 있던 군함들과 지상시설들은 이제 상처투성이가 되어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지상포화는 이제야 서서히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소류 소속의 급강하 폭격기대가 동해안으로부터 산을 넘어와 침입하기 시작했다. 제 5항공대의 수평폭격대원 고미 일등병은 리시버에서 들려오는 돌격 준비 신호를 듣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고도는 800m. 예광탄이 여기저기서 솟아오르고 있다. 다음 순간 폭격대원들은 일제히 250㎏폭탄을 떨어뜨렸다. 순간 폭풍으로 인해 기체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800m상공에서 250㎏폭탄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기체의 동요 때문에 잠시 정신을 잃었던 그는 동료의 목소리에 정신을 회복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버어버스 만과 산 부근 일대가 온통 검은 연기로 휩싸여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꺼내들고 이 광경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한편 아까기 소속의 야마다 대위는 대공포화가 가장 치열한 곳으로 급강하했다. 포화가 심한 곳에 가장 중요한 목표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급강하하고 있는 곳이 육상포대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기수를 돌려 태평양함대의 기함 펜실바니아를 습격했다. 그가 폭탄을 투하하자 엄청난 폭음과 함께 검붉은 구름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진주만에는 애리조나, 네바다, 메릴랜드, 테네시, 캘리포니아, 오클라호마, 웨스트 버지니아, 펜실바니아 8척의 전함을 중심으로 유조선과 예인선을 포함한 94척의 함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2회에 걸친 공격으로 애리조나는 대폭발을 일으켜 선체가 두 동강이 났고 오클라호마, 웨스트 버지니아, 캘리포니아는 침몰, 네바다, 테네시, 펜실바니아도 침몰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대파되었다. 이밖에도 순양함, 구축함 등의 피해가 많았으며 약 300대에 달하는 비행기를 잃었고 비행장을 비롯한 여러 군사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것은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태평양함대 94척의 18%였으며 전함은 100%손상을 입었다. 그리고 비행기는 88%가 피해를 입었다. 이것은 1차 대전 당시 미해군이 입은 손실을 훨씬 상회하는 숫자였다. 그리고 폭격으로 전사하거나 불타는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등 전사자는 2,403명, 부상자는 1,178명이었다.
이에 반해 일본측의 손해는 전투기 8, 함상 폭격기 15, 함상 공격기 5대등 도합 28대의 항공기를 상실했고 55명이 전사했다. 제 2파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아까기에서는 공격의 지속 여부를 두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의 결과 이미 만족할 만한 전과를 올렸다는 이유로 공격부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시간 8시 30분부터 북북서 방향으로 퇴피행을 개시했다. 약 2시간에 걸친 세기의 대기습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결정타를 안 날린 것은 일본 측의 최대 실수였다. 만일 미국이 진주만에 있던 유류 저장창고를 피격 당했다면, 그들은 6개월에서 1년까지도 함정을 운용할 수 없을 뻔했다고 한다. 다행히 일본이 제 3파 공격을 안 펼친 덕에 그 위기는 비껴갔으니, 이것은 미국의 행운인가? 일본의 실수인가? 오히려 진주만 기습은 미국 국민의 저력을 발동시키는 기폭제가 되었고, 기습에서 대파하였던 함정들은 불과 몇 일만에 수리를 끝내 피해가 없었던 태평양 함대와 함께 반격의 칼날을 갈게 되었던 것이다.
Ⅴ.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미일교섭(미국과 일본의 교섭)
헐 노트의 주된 내용
1.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의 무조건 철수
2. 삼국동맹의 사문화(死文化)
3. 중국의 장개석 정부를 지지
1941년 4월부터 11월까지 일본과 미국은 양국의 국교조정(國交調整), 중일전쟁의 처리, 일독이 삼국동맹, 대일금수문제(禁輸問題) 등을 협의하지만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문서를 받게 된다. 당시 주미 일본대사였던 노무라와 구르스대사에게 헐 노트가 전달 된 것이었다. 헐 노트라는 것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코델 헐에 의해서 작성된 문서로써 그 내용은 당시 일본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으며 일본 내에서는 치욕적이다. 라고 할 정도였다.
이 문서를 계기로 도죠 내각은 아직 미국과의 전쟁을 본격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기존의 방침을 180도 선회하여 미국과의 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한편에서는 미국이 이 문서를 일본에게 넘겨주며 이미 미국 수뇌부가 일본의 공격을 예감했다. 즉 미(美)국민의 전쟁참여 반대여론을 돌려놓기 위해 일본에 대한 강경책을 내 놓고 일본이 공격을 감행하게 만들어 미국의 2차대전 참전을 결정하도록 만들었다. 라는 음모론을 주장한다. 전시 징병제를 놓고 미 의회에서 표결에 붙였을 때 2표차이의 근소한 차로 통과 된 것을 보면 확실히 당시 미국은 전쟁참여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음모론에 대해서는 진주만기습 이후 일본으로부터 제해권(制海權)을 되찾는데 걸린 2년여의 시간과 인적, 물적 피해규모 등을 고려해 볼 때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으로 보인다.
이처럼 일본은 일미교섭 전까지 미국에 대한 전쟁은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 해 놓고 외교적 타협을 통해 대동아공영권을 구체화 시키려 했고 고노에 수상과 진주만 기습의 주도자 였던 야마모토 이소로꾸조차 미국과의 전쟁은 무리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미국의 헐 노트에 명시된 조건은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항복이냐 아니면 미국과의 결전이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만들었고 결국 일본은 미국에게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기습공격이다라고 주장한 이소로꾸의 주장을 받아들여 진주만 기습을 하게 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김태준 - 전략적 기습으로서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연구, 국방대학교, 2010
김순호 - 진주만 기습공격 작전의 전후, 대한민국 공군, 1973
김영숙 - 일본의 진주만 기습과 재미 일본인 사회의 동향, 한국일본어문학회, 2011
백상환 - 태평양 전쟁의 원인과 진주만 기습이 갖는 의미, 대한민국 육군, 1996
침사수 - 진주만기습공격의 연구, 공군사관학교, 1966
칼 스미스 저, 김홍래 역 - 진주만 1941, 플래닛미디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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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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