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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미니멀니즘][소설][회화][모노크롬회화][마당극][민중가요]1970년대의 미니멀니즘, 1970년대의 소설, 1970년대의 회화, 1970년대의 모노크롬회화, 1970년대의 마당극,1970년대의 민중가요 분석(1970년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1970년대의 미니멀니즘

Ⅱ. 1970년대의 소설
1. 농촌 공동체 파괴의 현실 고발 : 산업화에 따른 농촌의 궁핍화 현상과 농민의 고통스런 삶을 형상화함
1) 이문구의 「관촌수필」
2) 송기숙의 「자랏골의 비가(悲歌)」
2. 산업화와 노동자의 삶의 조건 반성 : 노동자 계층의 뿌리 뽑힌 삶의 현실과 유랑 의식을 드러냄
1)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2) 황석영의 「객지」
3) 윤흥길의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
4)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Ⅲ. 1970년대의 회화

Ⅳ. 1970년대의 모노크롬회화

Ⅴ. 1970년대의 마당극

Ⅵ. 1970년대의 민중가요

참고문헌

본문내용

로 벗겠어요
‘노장 과장’이라는 전통 가면극의 무대 설정 위에 대중가요가 겹쳐지면서 전통 연희 양식과 대중적 통속성이 혼합되고 있다. 특히 원작의 애절한 곡조와 가사를 저속한 취향으로 재전유함으로써 한국 여성에 대한 일본인들의 성 농락을 철저하게 비하시킨다. 대중가요에 대한 이 같은 패러디는 또한 당시 대중음악에 대한 정서적 불편함을 나타내면서 트롯트 양식과 일본 정서의 동일시를 제공하려 한다. 이는 또한 원작에서 ‘잊으라면 잊겠어요/당신이 잊으라시면’의 가사가 내포하고 있는, 서정적 자아의 소극적 객체성을 역전시킴으로써 ‘잊을 수 없음’의 당위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민족과 국가’의 비자주적 정체성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굴욕적인 한일 외교 정상화에 대한 민족적 분노를 전경화함으로써 새로운 체제의 대외 의존성을 힐난하고 있다.
① 아구 : (前略) 물 건너 쪽발이 바다 건너 코쟁이 산 넘어 똥뙤놈 재 넘어 마우재 그 건너 딴따라 죄 불러다가 직신 작신 박죽 뒤죽 우당탕 쿵쾅 와장창 잘들 놀아 처먹는구나 - (52면)
② 아구 : (前略) ‘사요나라 사요나라 빠이빠이 데쓰네 -’ 사요, 나라, 사요, 나라, 사요, 이빠이, 이빠이, 뭘 콱콱 사긴 사라는 말인가 본데, 나를 사요 나라를 사요 하는 게 돈만 내놓으면 영락없이 다 내놓겠다는 뜻이렷다! 이런 삼살하고 사참하고 오사하고 육시럴 년들 같으니라구! 허지만 그게 어디 불쌍한 고년들 잘못뿐이겄느냐 - (52면)
①에서 ‘쪽발이, 코쟁이, 똥뙤놈’으로 대표되는 주변 강대국에 대한 약소국가의 경계심 및 위기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 국면은 마치 구한말의 동북아시아 정세와 매우 흡사한 모습을 띠고 있다. 제국주의 열강의 노리개로 희롱 당하였던 과거 역사에 비해 현재 남한의 정국이 위치한 국면도 위험천만임을 경고한다. ②는 판소리 사설체를 원용하여 일본의 한국 재진입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사요나라(さよなら)’는 일본의 가장 보편적인 인사말이다. 그런데 이 인사말의 음절(音節)을 자의적으로 절합(切合;articulation)함으로써 일본이 다시 한국을 점유하려 한다는 경고를 한다.
피지배 계급의 동의를 획득하는 방식으로서의 절합은 보통 언어와 언어의 결합을 의미한다. 점더 넓게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가 부딪쳐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고 궁극적으로는 주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의미한다. 절합은 어떤 조건 밑에 있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요소들을 통일시킬 수 있는 연결 형태이다. 어떤 담론의 통일성은 다양하고 서로 구분되는 요소들을 절합시킨 것인데, 이들은 아무런 필연적인 ‘소속’이 없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재절합될 수 있다. 일테면 종교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구성체 내에서, 수많은 다양한 세력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무런 필연적이거나 고유한, 범역사적인 소속을 지니지 않는다. 이것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의미는 바로 어떤 구성체 내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위치’에서 생산된다.
Ⅵ. 1970년대의 민중가요
75년 긴급조치시대의 시작과 함께 낭만적 학생운동기는 끝을 맺게 되고, 학생운동은 양적인 축소와 함께 질적인 심화를 동반하게 된다. 즉,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분리되게 되고, 운동권은 일반학생대중과는 다른 인식, 다른 생활, 문화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반성하고, 바꾸고자 노력하며 대학 생활4년 동안 일생을 거는 결단을 해야 했다. 이들은 대중가요에 대해서도 비판적 관점을 가지면서 대중가요가 가지는 체제순응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자신의 노래문화를 반성하였으며, 새로운 노래문화를 원하였다. 민중가요는 바로 요 지점, 즉 학생운동권의 노래문화로 시작하였다. 대중가요에 대한비판 내지는 극복의 전망을 가지고, 대중가요와는 구별되는 향유층, 별도의 존재 방식을 가진 독자적인 노래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는 자생적인 노래문화였으며 이러한 민중가요를 주도하는 집단, 즉 노래운동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노래운동, 음악운동이 본격화되는 것은 84년경에 이르러서이다.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민중가요는 음악운동에 비해 선행하며, 대중 스스로 만들어 놓은 민중가요문화에 의해 노래운동의 성립과 발전이 추동되어 나아가는 식이었다) 김민기는 노래에 관한 한 한 개인일 따름이었을 뿐이고, 노래운동집단의 산실인 서울대 메아리와 이대 한소리는 아직 취미 써클차원의 모임이었다. 따라서 이들 대중가요 문화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가 아니라, 기존의 노래를 대중 스스로 선택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구전하는 방식으로 형성 되었다.
운동권의 노래로서 가장 먼저 선택된 것은 60년대 이후 불려왔던 소위 데모노래와 기타 몇몇의 노래들이었다. <해방가>, <탄아탄아>, <바람이 분다>, <스텐카라친>, <러시아농민가> 등에 75년 이후 <훌라송>, <정의가>등이 덧붙여진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훌라 / 같이 죽고 같이 산다 훌라훌라 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 / 우리들을 정의파다 훌라훌라 <훌라송> (미국남북전쟁당시 남군의 노래의 선율에 가사를 붙임)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교회운동이 발달하고, 교회가 사회운동에서 가지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진보적 교회운동에서 기존의 복음성가, 외국의 반전운동, 인권운동 노래들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그것이 다시 학생운동권으로 유입된다.(노래책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내일을 위한 노래}도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출간) <오, 자유>, <흔들리지 않게>, <우리의 믿음 치솟아>, <보람된 생활>, <이 시계절반은 나>, <가라 모세>, <춤의 왕>, <미칠 것 같은 이 세상>등등
참고문헌
김윤희(1996), 1970년대 한국 모노크롬 회화에 대한 예술사회학적 접근, 홍익대 석사논문
김복영(1993), 한국미술 70년대의 정신성과 그 이후 : 모더니즘의 개화와 그 유산, 공간사
민족문학사연구소(2000), 1970년대 문학연구, 소명출판,
문학사와비평연구회(1994), 1970년대 문학연구, 예하
채희완(1982), 70년대의 문화운동: 민속극운동을 중심으로, 문화와 통치, 민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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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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