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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산대놀이(산대도감놀이)의 변이과정, 공연방식, 산대놀이(산대도감놀이)와 북방유목민, 산대놀이(산대도감놀이)와 이철괴 탈춤, 산대놀이(산대도감놀이)와 송파산대놀이, 산대놀이(산대도감놀이)와 본산대놀이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산대놀이(산대도감놀이)의 변이과정
1. 첫째마당: 상좌춤마당
2. 둘째마당: 농주희(弄珠戱)
3. 셋째마당: 등장 대목의 변화
4. 양주별산대놀이의 놀이마당과의 대응 관계
1) 본산대놀이의 계승
2) 벽사가면적 측면의 부각
3) 종합적인 놀이마당의 분할과 일부 마당의 포기
4) 봉산탈춤의 비개성적인 면과의 대조적인 현상
5) 기득권 부정 3대 주제의 효과적 형상화

Ⅲ. 산대놀이(산대도감놀이)의 공연방식

Ⅳ. 산대놀이(산대도감놀이)와 북방유목민

Ⅴ. 산대놀이(산대도감놀이)와 이철괴 탈춤
1. 형성 시기
2. 변이 과정

Ⅵ. 산대놀이(산대도감놀이)와 송파산대놀이

Ⅶ. 산대놀이(산대도감놀이)와 본산대놀이

참고문헌

본문내용

연희(俳優), 악기 연주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후대에는 산악의 내용이 더욱 다양해졌다.
일본에서는 나라시대(奈良時代, 718-798)에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산악이 사루가쿠(猿樂)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전문적 놀이꾼들에 의해 궁정의 연회, 절의 법회, 신사(神社)의 제례, 특히 중국이나 한국의 나례와 동일한 의식인 추나식(追儺式)이 궁정이나 절에서 거행되는 경우 등에서 연행되었다. 산악이 일본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궁중에 산악을 담당하는 관리를 두어 보호 육성하였으나, 이것이 폐지되자 그 놀이꾼들은 민간에서 산악을 공연하게 되었다. 사루가쿠에서 가면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가마쿠라시대에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1336-1392)에 걸친 무렵이다. 이때 가면은 신령(神靈)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가마쿠라시대가 되면 종래 골계를 중심으로 했던 사루가쿠는 골계를 떠나 가무와 흉내내기를 중심으로 하는 노오(能)로 비약하고,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의 원래 사루가쿠는 교겡(狂言)이라는 한층 희극적인 공연물이 되었다. 남북조시대에는 각 지역에 사루가쿠 놀이패가 생기게 된다. 이 중 야마토(大和)사루가쿠의 유자키좌(結崎座)에서는 간나미(觀阿彌, 1333-1384)라고 하는 기예가 매우 뛰어난 사람이 중심적인 존재였다. 간나미의 아들 제아미(世阿彌, 1361-1442)는 아버지를 이어 노오를 대성했다.
한국의 산악은 중국의 사서에 기록된 내용, 일본에 전하는 고구려악, 고구려의 고분벽화 등을 통해 살펴볼 때, 4세기 이전부터 고구려에서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 한시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 고려시대에 팔관회와 연등회에서 연행한 가무백희, 고려 말 이색의 구나행(驅儺行)과 산대잡극(山臺雜劇)에서 묘사한 놀이, 조선시대에 궁궐에서 거행한 나례나 중국 사신 영접시에 설치한 산대(山臺)에서 놀던 산대잡희 또는 산대희, 나희라고 불리는 놀이, 송만재(宋晩載)가 1843년에 지은 관우희(觀優戱)에서는 전문적 놀이꾼들이 펼치는 놀이 등이 대부분 산악잡희에 해당하는 놀이였다. 이상의 기록들에 나타나는 오방귀무(五方鬼舞), 사자춤, 서역의 호인희(胡人戱), 처용무, 불 토해내기, 줄타기, 칼 삼키기, 솟대타기, 인형극,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百獸戱), 만연어룡지희(曼衍魚龍之戱), 무동, 근두박질, 줄타기 등이 바로 산악잡희 계통의 놀이인 것이다.
한국에서 산악 계통의 놀이를 놀던 사람들은 세습무계의 재인(창우집단)과 수척(백정) 등 북방유목민이었다. 이중 성균관에 속했던 백정인 반인(泮人)들에 의해 서울의 산대놀이가 성립된 것은 이미 살펴보았다. 반인들은 나례도감에 속해 나례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본산대놀이에는 나례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본산대놀이는 동몽골을 포함하는 북방유목민의 후예에 의해 전승되었기 때문에, 본산대놀이에는 몽골 등 북방문화의 영향이 남아 있다.
일찍이 아유가이 휴사노신(鮎貝房之進)은 다음과 같이 한국 가면극과 몽골문화가 깊은 관련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가) 광대는 고려 고종 무렵 몽고로부터 들어와 오로지 가면희를 연행하는 창우의 이름이었다.
(나) 고려의 현판에 목찰에 써서 꽂아놓은 것에 완보(完甫)가 쓰여져 있다. 완(完)과 완안(完顔)의 성씨는 한국에는 없고, 중국 금나라와 원나라의 성씨에는 많으므로, 이 완보는 몽고의 광대의 성씨가 오늘날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우선 탈탈박탈바가지완보 등의 용어가 몽골어라는 점을 주목한다. 그리고 가면극에 팔먹중취발이(최괄이)가 등장하는 것과 <남성관희자>의 인형극에 달자(子)가 등장하는 것도 그 놀이꾼이 북방유목민의 후예였기 때문인 듯하다. 특히 한국가면극은 각 과장이 독립적인 내용으로서, 마치 옴니버스 스타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등의 가면극은 한 편의 서사적 내용을 중심으로 극을 구성하고 있지만, 한국가면극은 몇 개의 독립적인 내용들이 모여서 극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도 역시 티벳에서 발생해 몽골 등에서 전승되고 있는 라마교 사원의 가면극 ‘챰’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러면 지면 관계상 위에서 지적한 북방문화의 영향 중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그동안 ‘탈’은 가면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몽골어 특히 고대몽골어에서는 ‘탈’이 얼굴을 가리키는 말이다. 찰스 바우덴(Charles Bawden)이 편집한 Mongolian-English Dictionary(1997)에 의하면, 몽골어 탈(tal)은 ‘일면(side)’, ‘한쪽 면’의 의미와 함께 ‘생김(feature)’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필자가 2000년 3월 24일-28일 몽골을 방문했을 때, 몽골사회과학원의 수미야바타르(Sumiyabaatar) 교수에게도 확인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머리의 앞면 즉 얼굴은 머리의 앞면과 뒷면 중 ‘한 면’에 해당하기 때문에, 현재도 ‘탈’은 얼굴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고대 몽골어에서 ‘탈’이 얼굴의 의미로 쓰였던 흔적이 현대어에 남아 있다. 현대 몽골어에서 “체면을 세우다”의 체면(體面)이나 면목(面目)을 ‘누르 탈’이라고 하는데, ‘누르’는 현대 몽골어에서 얼굴이라는 뜻이다. 주목되는 점은 몽고어에서는 단어의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해 동의어를 중첩하는 것이 매우 보편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르 탈’에서 ‘누르’가 얼굴의 뜻이면, 당연히 ‘탈’도 얼굴의 뜻인 것이다.
참고문헌
ⅰ. 경기대학 학도호국단 편집실(1980), 전통의 가면극 : 산대놀이를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ⅱ. 김원화(2005), 산대놀이 특성에 따른 사회문화적 기능에 관한 고찰, 한국사회체육학회
ⅲ. 김윤미(1993), 산대놀이 춤사위의 특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ⅳ. 사진실(2010), 산대탈의 전승 현황과 완보/말뚝이의 변천 양상 : 산대놀이의 변천 과정 재구를 위한 시론, 한국구비문학회
ⅴ. 이일지(2004), 조선시대 산대놀이 복식의 변모과정과 의복상징에 관한 연구, 한국복식학회
ⅵ. 최행수 외 1명(2010), 산대놀이의 체육문화사적 해석, 체육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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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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