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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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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텍스트생산의 의의

Ⅲ. 텍스트생산의 문학적 승화

Ⅳ. 텍스트생산의 존재론

Ⅴ. 텍스트생산의 기호놀이

참고문헌

본문내용

원으로 내려와야 한다. 바로 여기에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절대 관념의 세계에 일상적인 세계가 들어와야 하는 내적인 필연성이 있다. 그러나 독자를 통해 자신의 절약된 심적 에너지를 배출할 수 있으리라는 이상의 욕망은 좌절되고 만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數十年씩 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作定이냐. 모르는 것은 내 재주도 모자라겠지만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내던 일도 좀 뉘우쳐 보아야 아니하느냐. 여남은 개쯤 써보고서 詩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二千點에서 三十點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三十一年 三十二年 일에서 龍대가리를 떡 꺼내어 놓고 하도들 야단에 배암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 달고 그만두니 서운하다.
절대 관념의 세계에서 일상적인 세계로 많이 양보하여 지은 텍스트 烏瞰圖로, 자신의 절약된 심적 에너지를 배출하려 한 이상은 독자와의 합일에 실패한다. 독자와의 광범한 심적 일치점이 없는 상황에서 烏瞰圖에 표현된 ‘막다른/뚫린’, ‘무서운/무서워하는’, ‘질주하다/질주하지아니하다’의 모순 어법은 이해되지 않는다. 텍스트와 독자의 의사소통이 성공하려면 분명히 독자의 활동도 텍스트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통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작가와 독자 사이의 텍스트를 매개로 한 놀이는 독자를 끌어들이는 반향을 일으킬 때에야 비로소 절정에 이를 수 있다. 놀이는 질문과 대답, 도전과 반격, 선동과 전염, 흥분이나 긴장의 공유이다. 그러나 이상의 烏瞰圖는 독자와의 심적 공유에 실패한다. 독자가 이 烏瞰圖라는 텍스트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독자 자신도 이상이 가진 심적 억압을 내부에 출현시킬 수 있어야 했다. 다시 말해 독자가 작가와 심적 합치점을 지녀야만 그 난해한 빈틈에서 감정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감정을 작가에게 재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독자는 그러한 감정의 폭을 지니기에는 상상력이 부족하였다. 그들은 이상의 의식 세계를 이해할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한 셈이다. 따라서 이상의 의식에서 텍스트의 독자층은 ‘천하 눈 있는 선비’ 즉 뛰어난 감식안을 가진 구인회 회원으로 좁혀진다.
이상이 시도한 기호놀이의 수준이 낮았다면 독자의 참여는 그만큼 손쉬웠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상은 기호놀이에 심적 소비를 적게 하여 적은 억압만을 폐기하였다면 조그마한 만족감은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경우 심적 억압량이 그 존재를 위태롭게 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어서 소량의 심적 소비로는 그 막대한 억압량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죽음 의식을 억누를 수 있는 기호놀이란 죽음의 억압에 상응하는 에너지 소비량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수준 낮은 기호놀이로는 수위 높은 죽음 의식을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의 의식에는 죽음과 기호놀이가 등가를 이루고 있으며, 그 수준에 있어서도 죽음 의식 수준과 기호놀이의 수준은 비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일문 烏瞰圖와 한글 烏瞰圖의 관계는 일문 恐怖의 記錄과 한글 恐怖의 記錄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恐怖의 記錄 텍스트 군은 기호놀이의 양상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烏瞰圖가 승화로서의 아브젝트에 속하는 텍스트인 반면, 恐怖의 記錄은 증후로서의 아브젝트에 속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恐怖의 記錄 군의 텍스트에서는 일문烏瞰圖와 한글 烏瞰圖에서 볼 수 있었던 텍스트의 난해성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 恐怖의 記錄군의 텍스트에는 오직 허물어져 가는 현실 세계만이 반복되어 나타날 뿐이다. 다만 한글 恐怖의 記錄과 일문 恐怖의 記錄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문자의 차이와 통사구조의 파괴 정도만이 있다. 이상은 왜 감추고 싶은 더러운 현실을 굳이 한글로 드러내야 했을까?
이상은 恐怖의 記錄 텍스트 군에서 똑같은 내용을 문자를 바꾸어 가며 반복하고 있다. 그만큼 이 텍스트에 드러난 불쾌한 체험이 작가 이상에게는 결정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로이트의 포르트-다(fort-da) 게임 분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사람에게 반복강박을 일으키는 것은 그 사람의 고통스러운 체험이다. 인간이 고통스러운 체험이나 억압된 것을 드러내는 것은 이미 과거의 상흔을 극복했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에 쾌락원리에 모순되지 않은 불쾌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극복하려 해도 반복 강박되는 체험은 결코 제거되지 않고 일생 동안 붙어 다니는 악마적인(demonic) 성격을 지닌다. 이상에게 이 악마적인 체험은 하나의 운명으로서 느껴진다. 이상은 악마적인 것, 곧 운명적인 것에 대한 대결 의식에서 恐怖의 記錄을 쓴 것이다. 烏瞰圖의 세계가 불쾌한 경험을 회피하고 놀이 세계로 빠져든 경우라면, 恐怖의 記錄의 세계는 그것을 가식없이 드러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의 세계(죽음)와 도피의 세계(삶), 즉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기와 은폐하기라는 이중성이 이상문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세계는 전혀 대립적인 위치에 있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프로이트가 말한 쾌락원리로 수렴된다. 반복 강박적 요소 즉 억압된 것의 발현은 마음의 일부 체계에서는 불쾌인 동시에 다른 체계에서는 만족인 것이다. 고통스러운 체험에 대한 내적 고백은 주체에게 만족스러운 것이며 일종의 왜곡된 권력의지이다. 이상은 쾌락원리에 따라 자신의 과거를 백일하에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억압을 스스로 지배하고픈 충동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일본어로 씌어지고 발표되지 않은 恐怖의 記錄이란 한갓 일기의 형식과 유사한 것이어서 그러한 기록을 두고 완전한 지배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지배는 또 다른 의식 즉 독자에 의해서 인정을 받아야 성립될 수 있거니와, 여기서 恐怖의 記錄은 한글로 다시 씌어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고영근(2011), 텍스트 과학, 집문당
길지현(2010), 텍스트의 생산과 수용, 숙명여자대학교
우한용(2007), 문학텍스트의 생산과 해석의 관계, 한국고전여성문학회
이성민(2008), 텍스트언어학과 작문, 한국작문학회
장윤수(2005), 텍스트 생산의 담론 구조, 한국현대소설학회
조영돈(2006), 논술문 생산의 텍스트 언어학적 책략, 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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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09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70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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