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론
1. 문제제기 - 광주민주항쟁과 유신체제
2. 연구방향
Ⅱ. 이승만 권력과 박정희 권력의 비교 검토
1. 혁신계의 정치활동용인 여부
2. 지역감정과 지역 간 갈등의 이용여부
3. 정당정치와 의회정치
4. 정보정치 이용여부
Ⅲ. 반유신 민주화운동
Ⅳ.맺음말(경제난․학살․민주항쟁)
1. 문제제기 - 광주민주항쟁과 유신체제
2. 연구방향
Ⅱ. 이승만 권력과 박정희 권력의 비교 검토
1. 혁신계의 정치활동용인 여부
2. 지역감정과 지역 간 갈등의 이용여부
3. 정당정치와 의회정치
4. 정보정치 이용여부
Ⅲ. 반유신 민주화운동
Ⅳ.맺음말(경제난․학살․민주항쟁)
본문내용
상화」 『광주민중항쟁과 5월운동연구』,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1997, 238-239쪽
Ⅳ.맺음말(경제난·학살·민주항쟁)
유신체제는 부마항쟁과 김재규의 결단으로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붕괴되었다. 이후로 어느 누구도 유신체제로 되돌아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된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의 본질과 붕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세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첫째는 경제의 파탄이라고도 할만한 경제난이다. 학생 시위에 부산 마산의 상인들을 위시한 시민들이 적극 가세한 일은 근현대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불황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미 1978년 12월 12일의 총선에서 놀랍게도 야당인 신민당이 공화당보다 득표율이 1% 앞선 것은 서민들의 불만을 말해주는 것이었고, 그것은 1979년 6월 이후 김영삼의 대(對) 박정희 투쟁을 가속화시킨 기관차였다. 박정희는 중복투자와 국내외의 경제 사정으로 중화학공업이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데도,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1979년 1월 19일 연두기자회견에서 86년까지 중공업을 세계 10대 강국에 올려놓겠다는 이른바 웅비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중복투자로 인한 재원의 축소, 제2 오일쇼크 등으로 5월 25일 중화학투자 조정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자신이 키워놓은 재벌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어 처방은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 중화학공업은 대개가 가동률이 무려 50%에서 30%를 오르내렸다.
) 김의균, 앞의 글, 255-257쪽 및 朴炳潤, 「중화학공업계의 내막」 신동아 1980. 5. 참조
이러한 여파로 1980년의 경제성장률은 -5.2%로 추락하였던바,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편, 『한국의 사회정의 지표』, 민중사, 1986. 14-15쪽
최악의 경제상태였던 1951년 -6.1%성장 - 1952년 이후에는 마이너스성장이 없었다 - 이래
) 李漢彬, 『사회변동과 행정』, 박영사, 1968, 95-96쪽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둘째는 학살이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자신이 부산사태를 보고하자 박정희가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하겠다"라고 말했고, 그러자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200만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 문제냐"라고 거들었다고 증언하였다.
) 金在洪, 『군』2, 동아일보사, 1994, 169-170쪽
만일에 부산과 마산에서 항쟁이 일어나지 않고 광주항쟁이 7개월 앞당겨 일어났다면 경상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엄청난 학살극이 자행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귀담아 들을만하다. 최근에 베트남에서의 학살문제가 제기되고 있지만, 4월혁명후 보도연맹원 대학살, 거창양민 등의 학살 등 전쟁기에 군·경에 의한 대규모 주민집단학살(Genocide)의 진상규명을 요구한 유족회에 대하여 5·16쿠데타권력이 군·경에 대한 증오심을 조성케 하고 용공적 사상을 고취하였다고 구속하고 무덤을 파헤친 행위,
) 서중석, 앞의 책2, 788-793쪽
인혁당사건 8명에 대한 학살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대규모 민주·민중항쟁의 유발과 유신잔당의 말기적 준동이다.
비인간적 반문명적 파쇼억압체제는 여러 가지로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되어 있다. 특히 심한 경직성은 어느 사회나 있기 마련인 자동조절기능을 상실케 하여 엄청난 비용을 치르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전쟁일 수도 있지만 돌연한 사태나 대규모 민중항쟁의 유발로 표출될 수도 있다. 10월 17일부터 학생과 시민의 항쟁으로 번진 부마항쟁의 경우 부산에서만 경찰차량 6대 전소, 12대 파손, 21개 파출소 파손 또는 방화, 도청 세무서 방송국 신문사가 파손되었다고 정부는 발표하고 18일 0시를 기하여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편저, 앞의 책 2, 1765-1769쪽
10월 26일 박정희가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죽은 것도 유신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었다.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탄광도시인 사북에서 공권력이 마비되고 광원들이 지서를 점령한 것도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유신잔당에 의한 학살을 포함한 광주민주항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유신체제의 끝물로 1980년대에 유신잔당들이 한 행위도 보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것에 대항하여 80년대 내내 격렬히 싸운 민주항쟁 또는 민주·민족운동도 세계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Ⅳ.맺음말(경제난·학살·민주항쟁)
유신체제는 부마항쟁과 김재규의 결단으로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붕괴되었다. 이후로 어느 누구도 유신체제로 되돌아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된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의 본질과 붕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세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첫째는 경제의 파탄이라고도 할만한 경제난이다. 학생 시위에 부산 마산의 상인들을 위시한 시민들이 적극 가세한 일은 근현대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불황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미 1978년 12월 12일의 총선에서 놀랍게도 야당인 신민당이 공화당보다 득표율이 1% 앞선 것은 서민들의 불만을 말해주는 것이었고, 그것은 1979년 6월 이후 김영삼의 대(對) 박정희 투쟁을 가속화시킨 기관차였다. 박정희는 중복투자와 국내외의 경제 사정으로 중화학공업이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데도,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1979년 1월 19일 연두기자회견에서 86년까지 중공업을 세계 10대 강국에 올려놓겠다는 이른바 웅비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중복투자로 인한 재원의 축소, 제2 오일쇼크 등으로 5월 25일 중화학투자 조정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자신이 키워놓은 재벌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어 처방은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 중화학공업은 대개가 가동률이 무려 50%에서 30%를 오르내렸다.
) 김의균, 앞의 글, 255-257쪽 및 朴炳潤, 「중화학공업계의 내막」 신동아 1980. 5. 참조
이러한 여파로 1980년의 경제성장률은 -5.2%로 추락하였던바,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편, 『한국의 사회정의 지표』, 민중사, 1986. 14-15쪽
최악의 경제상태였던 1951년 -6.1%성장 - 1952년 이후에는 마이너스성장이 없었다 - 이래
) 李漢彬, 『사회변동과 행정』, 박영사, 1968, 95-96쪽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둘째는 학살이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자신이 부산사태를 보고하자 박정희가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하겠다"라고 말했고, 그러자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200만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 문제냐"라고 거들었다고 증언하였다.
) 金在洪, 『군』2, 동아일보사, 1994, 169-170쪽
만일에 부산과 마산에서 항쟁이 일어나지 않고 광주항쟁이 7개월 앞당겨 일어났다면 경상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엄청난 학살극이 자행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귀담아 들을만하다. 최근에 베트남에서의 학살문제가 제기되고 있지만, 4월혁명후 보도연맹원 대학살, 거창양민 등의 학살 등 전쟁기에 군·경에 의한 대규모 주민집단학살(Genocide)의 진상규명을 요구한 유족회에 대하여 5·16쿠데타권력이 군·경에 대한 증오심을 조성케 하고 용공적 사상을 고취하였다고 구속하고 무덤을 파헤친 행위,
) 서중석, 앞의 책2, 788-793쪽
인혁당사건 8명에 대한 학살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대규모 민주·민중항쟁의 유발과 유신잔당의 말기적 준동이다.
비인간적 반문명적 파쇼억압체제는 여러 가지로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되어 있다. 특히 심한 경직성은 어느 사회나 있기 마련인 자동조절기능을 상실케 하여 엄청난 비용을 치르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전쟁일 수도 있지만 돌연한 사태나 대규모 민중항쟁의 유발로 표출될 수도 있다. 10월 17일부터 학생과 시민의 항쟁으로 번진 부마항쟁의 경우 부산에서만 경찰차량 6대 전소, 12대 파손, 21개 파출소 파손 또는 방화, 도청 세무서 방송국 신문사가 파손되었다고 정부는 발표하고 18일 0시를 기하여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편저, 앞의 책 2, 1765-1769쪽
10월 26일 박정희가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죽은 것도 유신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었다.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탄광도시인 사북에서 공권력이 마비되고 광원들이 지서를 점령한 것도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유신잔당에 의한 학살을 포함한 광주민주항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유신체제의 끝물로 1980년대에 유신잔당들이 한 행위도 보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것에 대항하여 80년대 내내 격렬히 싸운 민주항쟁 또는 민주·민족운동도 세계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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