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에 대한 의결이 지연되는 등 폐단이 나타나기도 하여 군사적 분쟁이나 국제통화문제 등 중요한 문제들이 국제연합 밖에서 논의되고 결정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국제연합의 한계성도 종종 지적된다. 코소보전쟁이 국제연합의 한계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공습이 말해주듯이 인도적 개입을 이유로 또다른 형태의 무력사용을 정당화하였기 때문이다. 평화 후의 부흥과 개발원조에는 평화유지활동기구가 많은 공헌을 하지만, 내란에 국제연합이 직접 관여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K.아난 국제연합 사무총장은 '신뢰받는 국제연합'을 모토로 새로운 내부기관과 기금을 정비하고, 정체된 안전보장이사회의 활성화와, 사회개발 분야에도 개혁의지를 보이고 있다. 난민구조·마약퇴치·인구와 개발 등 21세기의 세계질서를 모색하고 있다. 제55차 총회를 '밀레니엄 총회'라 이름하고 NGO(국제비정부기구)밀레니엄 포럼을 기획하는 등 21세기의 국제연합은 더 많은 활동을 기획하고 있다.
6. 대한관계
-국제연합은 1948년 12월 12일 소련 등 6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소총회를 열고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는 소련이 자유중국의 대표권에 항의하여 불참한 가운데 미국 주도로 신속히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유엔군 파병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수주일 후 소련이 복귀하여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할 수 없었고, 미국의 주도로 파병이 이루어졌다. 한국은 1951년 11월 뉴욕 국제연합 본부에 상주대표부를 설치하고 대사를 파견하였다. 북한은 1949년부터 국제연합 가입을 신청하였으나 거부되었고, 1973년 옵서버사무소를 설치하고 제28차 총회 이후 한국과 함께 옵서버로 참가하였다. 1985년 10월 총회에서 최초로 한국의 국무총리 노신영과 북한의 부주석 박성철이 함께 연설하였다. 한국과 북한의 국제연합 가입문제는 미·소냉전과 남북한의 대결 및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 행사로 번번이 좌절되었으나, 1991년 9월 17일 ROK(대한민국)과 DPRK(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 국호로 동시 가입하였다.
한국은 이밖에도 ASPAC(아시아태평양이사회),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회의), ADB(아시아개발은행)의 회원국이며, 1996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였다.
1996년 국제연합인권위원회에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한국인 종군위안부에 대한 보고서가 접수되었다. 이 보고서는 일본정부에 대해, 구일본군의 위안소제도는 국제법에 위배되며,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관련자료의 완전공개, 가해자의 공식사죄, 교육을 통한 문제의 인식, 책임자의 처벌을 골자로 한다.
1997년 대기업의 잇단 부도와 금융위기 등 경제적 파탄이 일어나 국제연합 관련 정부간 기구인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150~200억 달러 지원받았다. 1999년 10월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에 국제연합 PKF(국제평화유지군)의 자격으로 특전사 1대대, 의료 및 공병요원 일부가 혼합 편성된 상록수부대 419명을 파병하였다.
그러나 국제연합의 한계성도 종종 지적된다. 코소보전쟁이 국제연합의 한계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공습이 말해주듯이 인도적 개입을 이유로 또다른 형태의 무력사용을 정당화하였기 때문이다. 평화 후의 부흥과 개발원조에는 평화유지활동기구가 많은 공헌을 하지만, 내란에 국제연합이 직접 관여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K.아난 국제연합 사무총장은 '신뢰받는 국제연합'을 모토로 새로운 내부기관과 기금을 정비하고, 정체된 안전보장이사회의 활성화와, 사회개발 분야에도 개혁의지를 보이고 있다. 난민구조·마약퇴치·인구와 개발 등 21세기의 세계질서를 모색하고 있다. 제55차 총회를 '밀레니엄 총회'라 이름하고 NGO(국제비정부기구)밀레니엄 포럼을 기획하는 등 21세기의 국제연합은 더 많은 활동을 기획하고 있다.
6. 대한관계
-국제연합은 1948년 12월 12일 소련 등 6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소총회를 열고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는 소련이 자유중국의 대표권에 항의하여 불참한 가운데 미국 주도로 신속히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유엔군 파병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수주일 후 소련이 복귀하여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할 수 없었고, 미국의 주도로 파병이 이루어졌다. 한국은 1951년 11월 뉴욕 국제연합 본부에 상주대표부를 설치하고 대사를 파견하였다. 북한은 1949년부터 국제연합 가입을 신청하였으나 거부되었고, 1973년 옵서버사무소를 설치하고 제28차 총회 이후 한국과 함께 옵서버로 참가하였다. 1985년 10월 총회에서 최초로 한국의 국무총리 노신영과 북한의 부주석 박성철이 함께 연설하였다. 한국과 북한의 국제연합 가입문제는 미·소냉전과 남북한의 대결 및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 행사로 번번이 좌절되었으나, 1991년 9월 17일 ROK(대한민국)과 DPRK(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 국호로 동시 가입하였다.
한국은 이밖에도 ASPAC(아시아태평양이사회),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회의), ADB(아시아개발은행)의 회원국이며, 1996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였다.
1996년 국제연합인권위원회에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한국인 종군위안부에 대한 보고서가 접수되었다. 이 보고서는 일본정부에 대해, 구일본군의 위안소제도는 국제법에 위배되며,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관련자료의 완전공개, 가해자의 공식사죄, 교육을 통한 문제의 인식, 책임자의 처벌을 골자로 한다.
1997년 대기업의 잇단 부도와 금융위기 등 경제적 파탄이 일어나 국제연합 관련 정부간 기구인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150~200억 달러 지원받았다. 1999년 10월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에 국제연합 PKF(국제평화유지군)의 자격으로 특전사 1대대, 의료 및 공병요원 일부가 혼합 편성된 상록수부대 419명을 파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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