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하성군 이균의 왕위 승계와 태생적 한계
2. 임진왜란의 발발과 선조의 파천
⑴ 임진왜란의 발발과 급박한 상황
⑵ 선조의 초조함과 파천(播遷) 논의
Ⅲ. 결 론
- 대국(大國)의 왕과 소국(小國)의 왕의 근본적 차이
Ⅱ. 본 론
1. 하성군 이균의 왕위 승계와 태생적 한계
2. 임진왜란의 발발과 선조의 파천
⑴ 임진왜란의 발발과 급박한 상황
⑵ 선조의 초조함과 파천(播遷) 논의
Ⅲ. 결 론
- 대국(大國)의 왕과 소국(小國)의 왕의 근본적 차이
본문내용
라가 국난을 극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한다. 지키고 버틴다고 해서 명나라에서 원군이 오는 것도 아닌 상황이었다. 고립된다면 죽는 것 밖에 없었다. 왜군에 항복했다면 그것은 중국에 파천하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이 될 것이고, 왜군에게 항전하다가 죽는다면 나라를 무너뜨린 무능한 왕이 되었을 것이다.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그는 결국에 국난을 극복했다. 전쟁은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적어도 그가 살아 남은 것은 나름의 고민과 능력을 보인 결과다. 정말 무능력한 것은 전쟁에서 무책임하게 죽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막지 못한 책임과 그 과정에서 보인 일련의 행동들에서 비판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선조에 대한 평가가 너무 가혹한 것만은 아니었을까? 그가 비록 용기는 없을지라도 영웅이 될 자질은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사람 자체를 어리석은 인물로 몰아세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국의 군주가 가져야 할 태도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소국의 군주로서 선조의 고민을 통해 선조의 입장이 되어 바라본다면 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이한우, 『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서울: 해냄), 2007
『명종실록』
명종 34권, 22년(1567 정묘 / 명 가정(嘉靖) 46년)
- 6월 28일 신해 1번째 기사 「병이 위독하여 정승 등이 입시하였으나 말을 하지 못하다」
『선조실록』
선조 22권, 21년(1588 무자 / 명 만력(萬曆) 16년)
- 3월 26일 기유 2번째 기사 「남방의 왜변을 걱정하여 죄인 중에서도 무재가 있는 자를 서용하다」
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4월 13일 임인 1번째 기사 「왜구가 쳐들어 와, 동래 부사 송상현 등이 죽다」
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4월 28일 정사 1번째 기사 「충주의 패전 보고가 이르자 파천을 의논하다」
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5월 3일 임술 13번째 기사 「신잡이 돌아오자, 적의 형세와 평양으로 옮길 일을 논의하다」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6월 2일 경인 4번째 기사 「대신과 양사 및 이희득이원익 등을 인견하고 의주 등 옮길 곳을 논의하다」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6월 8일 병신 2번째 기사
「임진에서 패한 뒤 적군이 황해도 군현을 마구 침입하고 선봉대가 대동강가에 주둔하다」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6월 11일 기해 5번째 기사 「좌의정 윤두수의 말에 따라 중국에 가까운 용만을 향하다」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6월 13일 신축 7번째 기사 「저녁에 신하들을 인견하고 대가의 이어에 대해 논의하다」
『선조수정실록』
선수 26권, 25년( 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5월 1일 경신 1번째 기사 「상이 동파관을 출발하다」
《참고문헌》
이한우, 『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서울: 해냄), 2007
『명종실록』
명종 34권, 22년(1567 정묘 / 명 가정(嘉靖) 46년)
- 6월 28일 신해 1번째 기사 「병이 위독하여 정승 등이 입시하였으나 말을 하지 못하다」
『선조실록』
선조 22권, 21년(1588 무자 / 명 만력(萬曆) 16년)
- 3월 26일 기유 2번째 기사 「남방의 왜변을 걱정하여 죄인 중에서도 무재가 있는 자를 서용하다」
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4월 13일 임인 1번째 기사 「왜구가 쳐들어 와, 동래 부사 송상현 등이 죽다」
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4월 28일 정사 1번째 기사 「충주의 패전 보고가 이르자 파천을 의논하다」
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5월 3일 임술 13번째 기사 「신잡이 돌아오자, 적의 형세와 평양으로 옮길 일을 논의하다」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6월 2일 경인 4번째 기사 「대신과 양사 및 이희득이원익 등을 인견하고 의주 등 옮길 곳을 논의하다」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6월 8일 병신 2번째 기사
「임진에서 패한 뒤 적군이 황해도 군현을 마구 침입하고 선봉대가 대동강가에 주둔하다」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6월 11일 기해 5번째 기사 「좌의정 윤두수의 말에 따라 중국에 가까운 용만을 향하다」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6월 13일 신축 7번째 기사 「저녁에 신하들을 인견하고 대가의 이어에 대해 논의하다」
『선조수정실록』
선수 26권, 25년( 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 5월 1일 경신 1번째 기사 「상이 동파관을 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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