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 차코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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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마야, 차코의 붕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마야, 차코의 붕괴


Ⅰ. 마야의붕괴
1. 마야 지역의 위치
2. 마야 문명의 전개
3. 마야 문명의 문화
4. 마야문화의 성격
5. 마야 문명의 자연환경
6. 마야 문명의 화전농업
7. 마야 문명의 지역적 연결과 발전
8. 마야의 붕괴
ⅰ. 마야의 붕괴는 외부 침입에 의해 발생?
ⅱ. 마야의 붕괴는 인구의 급격한 감소 때문에?
ⅲ. 붕괴는 여파는 지역마다 다르다!

Ⅱ. 차코의 붕괴
1. 차코의 위치, 기후
2. 차코의 특징
3. 차코의 붕괴
ⅰ. 과잉건축-삼림 및 환경의 파괴
ⅱ. 인구증가-지나친 경작-농지와 자원의 고갈-분쟁증가(내전발생)
ⅲ. 에너지 평준화 체제의 붕괴-다양성 상실
ⅳ. 지도층의 경직된 위기 대처 방식
ⅴ. 외부 세력의 침입

본문내용

4108개가 쓰였다. 체크로케틀을 짓는 데 들어간 2만6000그루의 나무 중에서 6000그루는 최소한 50킬로미터 떨어진 고지대에서 벌채한 전나무였다. 나머지는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삼림에서 들여온 소나무였다. 1020년과 1120년 사이에 차코 협곡의 유적 한 곳에만 추스카 산맥에서 수입한 도자기가 4만점이 넘는다.
조사 결과 차코 협곡의 연구는 절정기에 4400명에서 1만 명 사이였다. 지역의 환경 조건을 고려할 때 이 인구 가운데 일부는 주변의 농경지나 식물 자원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차코에서도 가장 큰 대가옥의 하나인 푸에블로보니토의 옥수수 속은 차코의 여타 지역에서 나온 옥수수 속보다 크기가 25퍼센트 가량 크다. 이것은 푸에블로보니토의 상류층이 수입한 옥수수를 먹고 살았음을 암시한다. 또 다른 대가옥이 있는 푸에블로알토에서 고고학자들은 일반 농촌 지역보다 다채로운 식물 종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외부 자원에 의존했음을 말해준다. 석기와 원료도 상당수는 밖에서 수입되었다.
12세기 중엽 쪼는 13세기 초엽이 되면 차코 체제는 사실상 무너져 내렸다. 협곡을 비롯하여 기타 분지 지역에는 여전히 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대가옥은 더 이상 지어지지 않았다. 건축은 마을에만 세워지거나 아니면 기존의 대가옥에 방들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 졌다. 대가옥의 잔해에서 훔쳐온 맷돌로 담을 쌓기도 했다. 인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반듯반듯한 건물을 계획적으로 지어나가던 시절은 이미 흘러가버렸다. 차코는 더 이상 경제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1300년 이후 이 지역은 농민들에게 사실상 버림을 받았다.
3. 차코의 붕괴
ⅰ. 과잉건축-삼림 및 환경의 파괴
아나사지 문명이 절정에 이르렀던 1075~1100년 사이에 사람들은 거대한 푸에블로를 짓기 위해 나무를 많이 사용했다. 이 때문에 거주지 주변 지역이 대부분 벌거숭이가 되자 아나사지 인디언들은 목재를 구하려고 더 먼 곳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또한 나무와 덤불을 땔감으로도 사용했다. 이처럼 목재와 땔감을 많이 사용하다보니 숲이 심하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인구가 늘면서 주위의 천연자원이 엄청난 압박을 받게 되었다. 땅에서 필요한 자원을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자 아나사지 문화는 붕괴했고, 이 문화의 기반이 되었던 생태계도 함께 무너졌다. (그때로부터 8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차코캐니언 숲은 복원되지 않았다.)
ⅱ. 인구증가-지나친 경작-농지와 자원의 고갈-분쟁증가(내전발생)
차코 체제는 식량의 안정적 조달에 힘쓰고 인구 감소를 낳는 자연적 제약을 줄이는 데 주력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1080년대와 1090년대에 인구가 상당히 늘어났다. 그 결과 경작지를 조금이라도 확대하여 농작물 생산량을 늘려야했다. 그런데 인구증가율에 비해서 토지 증가율이 낮았기 때문에 농경지 부족 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가뭄도 발생하게 되어 작물 생산이 줄어들었다. 식량조달의 불안정성과 식량 부족 사태가 일어나게 되자 1150~1200년에 분쟁이 증가하고 맹렬한 내전이 벌어지면서 결국엔 붕괴되고 말았다.
ⅲ. 에너지 평준화 체제의 붕괴-다양성 상실
에너지 평준화 방식은 새로운 공동체가 들어왔을 때 지역 교환 체제의 다양성과 생산성이 전체적으로 늘어났을 경우에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체제의 다양성을 늘리는 데 조금도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떨어뜨리는 공동체가 하나 둘 들어왔다. 또한 대가옥이 많이 지어지면서 외곽 주거지 사이의 평균거리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인접지역들 사이의 농작물 생산 주기가 겹쳐지기 게 되자 다양성이 상실되었다. 즉, 일부지역에서 발생한 잉여자원의 덕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었고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지역들에 배분되는 양도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건축에 대한 투자는 오히려 늘어났고, 그 결과 한계수익이 저하되자 (한계수익이 줄어들면 복잡성은 전략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지역 교환망에서 빠져나오는 공동체가 하나 둘 늘어났다.
차코 사회는 식량, 목재, 도기, 돌, 사치품 등을 교환하면서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사회를 유지해 나갔는데 앞의 사정들로 인하여 교환망이 약화되자 지역 간의 교환이 중단되면서 결국 사회전체가 붕괴되었다.
ⅳ. 지도층의 경직된 위기 대처 방식
차코 사회는 계층 사회였는데 지도자들은 사회에 위기가 생기면 도로를 건설하고, 의식을 치르고, 집을 지었다. 즉 지도자들의 위기 대처 방식은 지나친 경작과 과잉 건축이었다. 건축 열기가 차코 사회를 마지막으로 휩쓸었을 때, 지도자들은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웅장하기 짝이 없는 건물을 세웠다. 폰데로사 소나무 수십만 그루가 (협곡 바닥에서 무섭게 늘어나던) 푸에블로의 지붕 지지대로 쓰였다. 길이가 최고 9미터나 되는 거대한 통나무들이 32~48킬로미터 떨어진 외곽의 숲에서 운반되었다. 1050년 이후에 건설된 도로도 목재 운반에 이용되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폭이 3~9미터인 도로가 640킬로미터나 건설되어 있었다. 또한 지도층들은 옥수수를 생산하는 농부가 없다면 사회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닫지 못했다. 농부들이 농사를 지어 식량을 공급하고, 물과 땔감을 운반하고, 옥수수를 갈고, 각종 도구와 천가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어 교역을 하고, 겨울에 입을 면 외투와 토끼 모피와 칠면조 깃털 담요를 만드는 데 수만 시간을 바쳐야만 차코 사회가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의 지도하에 수많은 농부들은 커다란 푸에블로와 640킬로미터가 넘는 도로를 건설하는 데는 수억 시간을 바쳤다. 그 결과 숲은 고갈되고 자원은 부족해지니 차코사회는 붕괴되었다.
ⅴ. 외부 세력의 침입
차코 유적지 중에는 여러 곳이 불에 탄 흔적이 있고, 종교적인 의식이 치러지는 곳에도 화재의 흔적이 있다. 또한 생활필수품들이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전쟁이 있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급히 피난가면서 생활필수품들을 갖고 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차코 사회는 풍부한 자원, 물, 수로시설 등 풍요로운 시대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웃의 침략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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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0.23
  • 저작시기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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