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남자들만의 공간 군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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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내가 겪은 남자들만의 공간 군대이야기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도 곧잘 들었던 나로서는 누군가 나를 그렇게 미워한다는 사실이 힘들게 했던 것 같다. 그런 중에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함께 선임병들 눈치를 보고 함께 생활했던 동기들 덕이었던 것 같다.
이등병으로 수송부 생활을 한지 한 달 반이 지나고 나서 사단 훈련소를 나온 이등병들은 운전 교육을 받기위해 제2 수송교육대(이수교)로 교육 파견되었다. 그곳은 이른바 ‘이등병의 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모두가 같은 이등병 교육생이었고 잔업 없이 운전 교육만을 받는 곳이었다. 4주간의 달콤한 이수교 생활을 마치고 자대로 돌아왔을 때 갑작스럽게 나는 군단장님 운전병이 아닌 당번병으로 뽑혀 내무 생활을 마치고 공관으로 가게 되었다. 내가 이수교에 있는 동안 군단장님이 바뀌셔서 나보다 두 달 선임인 운전병을 데려오셨고 전임 군단장님이 당번병을 데려가셔서 공관 당번병 자리가 비게 되어 운전병으로 뽑혀온 내가 올라가게 된 것이다. 당번병이란 군대 내에서만 있는 것이라 개념이 모호한 것이고 부대마다 조금씩 다른 것이었는데, 우리 부대의 당번병은 수송부 운전병 중에서 뽑았다. 공관에는 군단장님 관용차인 소위 ‘1001호’차가 있었고 예비 차량이자 사모님 차인 뉴그랜져‘1019호’가 있었다. 당번병은 먼저 이 1019호 운전병으로서 사모님을 모셨고 동시에 공관의 청소나 관리 및 군단장님의 공관에서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역할이었다. 현재 육군참모총장이 취임하시면서 모든 장군 공관에 사모님 차라는 것이 없어졌다고 하니까 아마도 내가 당번병으로서 사모님차를 몬 마지막 군번쯤 되는 것 같다. 사실 내가 모셨던 사모님은 서울 본가에 계시고 주말에만 내려오셔서 내가 운행하는 것은 터미널에 모시러가고 모셔다 드리는 것뿐이었다. 대부분의 나의 역할은 공관에서 군단장님 시중을 들고 군단장님 안계실 때 내실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물론 공관에 있는 정원의 나무나 옆 마당에서 키우던 개들을 돌보는 것의 실무자도 바로 나였다.
공관에는 군단장님과 당번인 나와 운전병, 조리병, 그리고 전속부관이 함께 살았다. 군단장님이 계시는 불필요할 정도로 넓은 거실과 방 몇 개와 식당이 있고 식당으로 조리병이 요리하는 커다란 주방이 연결되어 있고, 그 옆의 복도를 따라 부관과 우리 사병 3명이 생활하는 방들이 있었다. 물론 우리는 차고 옆에 있는 뒷문으로 드나들었다. 공관에 처음 올라 갔을 때 생활은 내무 생활에 막 적응해가던 나에겐 또 다시 새로운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사병이고 계급 사회의 틀 안에 있었지만 일반 가정과 같은 공간에서 때로는 민간인처럼 생활해야 하기도 했다. 군단장님 사복을 세탁 맡기러 읍내의 세탁소에도 가야했고, 공관을 관리하고 물품을 사다주는 본부대장님 사모님과도 친하게 지내야 했다. 무엇보다도 공관 안에서는 사복을 입었고 행동도 어느 정도 자유로웠기 때문에 처음엔 마냥 좋았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어느새 민간인인양 착각하기도 했고 그래서 비서실장님이나 부관에게 얼차려를 받기도 했다. 당번의 역할은 요리를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반 가정주부나 파출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매일같이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청소를 해야 했고, 군단장님 사복이나 전투복, 정복관리도 해야 했다. 군단장님이 필요한 것은 먼저 말씀하시는 성격이시라 하나하나 지시해주셨지만 그렇다고 먼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거실에 항상 있어야 하는 물은 다 드시지 않았을까, 선물 관리는 어떻게 할까, 어디 멀리 시찰가실 때 뭘 준비해야 할까 등등 항상 생각하고 고민해야 했다. 공관 옆의 육각정에서 회식이 있는 날이면 조리병이 음식을 만들고 내가 셋팅이나 서빙을 해야 했다. 간부식당에서도 지원이 오기도 했지만 군단장님 지시로 큰규모의 회식이 아니면 공관병만으로 치르도록 했다. 참모들의 인사철이면 일주일에 4~5번 회식을 하기도 했다. 내가 지금 군인인지 횟집이나 고깃집 아르바이트생인지 gpt갈릴 정도였다. 그렇게 바쁠 때도 있었지만 군단장님이 안 계신 동안에는 공관에서 나름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공관 일이 힘들고 군인으로서 자괴감이 들만도 했지만 작은 일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게 보람이 있었다. 군단장님 운동복 깃을 한번 다듬는다거나 회식할 때 누구보다 잘 서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만의 보람을 느껴가고 있었다.
사실 당번병의 역할이라는 것이 한달에 몇 차례 운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회에서는 여성이 주로 하는 일이었다. 여성 없이 남성만이 존재하는 군대라는 공간에서 나는 여성이 하고 있는 역할을 맡아 체험한 것이다. 물론 남성, 여성이 해야 할 일이 따로 정해진 것은 없지만 일반적인 사회통념상 말이다. 실제로 사모님이 내려와 계실 땐 나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시기도 했다. 커피를 맛있게 타는 방법이라든가 손님을 접대하는 법이라든가 군단장님 옷 관리하는 법들이었다. 그동안 어머니가 해주시는 것만 받고 살았던 막내 아들인 나로서는 새롭고 재미있는 세상이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조리병과도 친하게 지내면서 간단한 요리법 같은 것도 배울 수 있었다. 조리병과 나는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는데 회식을 치르려면 우리 둘의 호흡이 잘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실제로 했던 역할보다 더 여성적인 역할을 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생활했던 공간이 ‘여성적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남향의 거실에 거대한 창이 있었던 군단장님의 공관과는 다르게 우리가 생활했던 숙소는 해가 들지 않는 북향이었다. 더구나 군단장님이 계시는 거실과 우리가 생활하던 공간간이 연결되는 것은 바로 조리병의 주방을 통해서였다. 내가 군단장님의 출근복을 넣어드리거나 옷을 빼오거나 할 때도 이 주방을 통해서 드나들었다. 군단장님이 남성의 가부장적 권위를 상징했다면 우리는 그 뒤에서 공관을 관리하고 보필하는 여성적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우리가 대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공관의 물품을 사주시거나 관리를 도와주시던 본부대장 사모님은 거의 매일 공관에 드나드셨고, 우리 사모님이 내려와 계실 때에는 참모들의 사모님들이 주방에 사모님 드실 것들을 가져오며 우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추석같은 명절에는 참모사모님들과 같이 주방에서 송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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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0.25
  • 저작시기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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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87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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