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반둥회의와 화교 딜레마
-동남아의 탈식민 국가와 ‘국공외전’의 관점에서-
* 반둥으로 가는 길
*주은래, 인도네시아 화교들에 대한 발언
* 대만과 남베트남 국적법 문제
* 1940년대 대만의 전략 지위
*건설 신‘조국’
‘해외동포는 단결하라’ 내용..............
‘화교경제검토회의’ 내용........................
화교 교육-반공-미국 원조.
원조중국지식인사협회(Aid Refugee Chinese Intellectuals, Inc) ‘원지회’ 1950년 결성.
화교 정책의 현재
-동남아의 탈식민 국가와 ‘국공외전’의 관점에서-
* 반둥으로 가는 길
*주은래, 인도네시아 화교들에 대한 발언
* 대만과 남베트남 국적법 문제
* 1940년대 대만의 전략 지위
*건설 신‘조국’
‘해외동포는 단결하라’ 내용..............
‘화교경제검토회의’ 내용........................
화교 교육-반공-미국 원조.
원조중국지식인사협회(Aid Refugee Chinese Intellectuals, Inc) ‘원지회’ 1950년 결성.
화교 정책의 현재
본문내용
으로 이주하면, 대만의 경제건설에도 유리하고, 동아시아 자유 세력의 핵심 역량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화교에 이어서 난민 지식인을 활용한 미국-대만-동남아의 반공·자유 네트워크를 건설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만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공산당의 침투를 우려하여, 대륙과의 인적 교류 또한 봉쇄한 상태였다. 특히 국민당 정부는 홍콩에 있는 지식인들이 ‘제 3세력’이라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 여론조사에서도 이들 지식인들이 공산당에는 결연히 반대하면서도, 결코 친국민당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난민 지식인들 또한 국민당이 통치하고 있는 대만으로 가기를 원치 않은 것이다. 대체로 미국이나 동남아를 선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미국 이민법 규정 상 1년에 화교 이민은 105명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동남아 각국에서도 화교에 대한 반감이 증폭되고 있었기에 난민 이주는 어려운 상태였다. 홍콩의 난민 지식인들이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던 가운데, 대만의 국민당 정부의 태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해외 화인들에게 정통 중국의 정체성을 승인받고 지지를 구하가 위해, 또 정치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 원지회와 합작하여 홍콩 지식인 이주를 허용하기로 한 것이다. 마침 대륙의 공산당이 홍콩에서 대만으로 간 중국인들이 핍박받고 있는다는 선전 공작을 하고 있었기에, 국민당이 주도적으로 이민을 허용하면 공산당의 선전 효과를 반감시키고 국제적 지위 향상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비용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미국의 개입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미국 정부는 원지회가 확보하고 있는 명단을 활용하여 동남아-화교-대만을 잇는 고리로 난민 지식인을 활용하기로 한다. 이로써 원지회의 소극적 원조 활동은 미국 정부의 주도 하에, 적극적인 난민 활용으로 진화한 것이다. 이들 지식인들의 출판물을 활용해서 홍콩, 마카오, 대만은 물론 동남아에서도 반공 교재로 활용한다. 난민 지식인을 통해 동남아 지역의 공산주의 침투를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 초 홍콩 서점가를 지배했던 대륙의 저렴한 공산주의 출판물을 대신하여 이들의 출판물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난민 지식인들 또한 반공 선전의 첨병이 되어 있었던 셈이다. 고등 교육을 받은 엘리트의 가치를 적극 활용하여 공산주의의 아시아 확산의 방패막으로 삼은 것이다.
(냉전형 학술동맹)
화교 정책의 현재
현재까지도 화교의 지지를 얻기 위한 양안 간의 경쟁은 끝나지 않았다. 특히 대만이 UN에서 퇴출되고,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으로 전환한 70년대 후반부터 역전 현상이 일기 시작한다. 통계 자료를 보면 화교, 화인사회가 점진적으로친국민당의 입장에서 중공 정책의 지지로 돌아서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고, 화교사무위원회는 11월에 설립된다. 1949-54년 동안 기본적으로 중국은 국민당의 화교 정책을 계승했다. 혈통주의 원칙에 입각한 국적법을 채용하고 해외 화인 모두를 중국 국민으로 간주한 것이다. 법률상으로도 화교의 참정권을 인정하고 있었고, 해외 화교의 보호를 정부의 중요 임무의 하나로 간주했다. 대외적으로 해외화교를 향해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선전 공작을 전개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측면에서 당시 중국의 정책 중점은 정권의 확립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을 비롯하여 주변 지역의 안보 위기 해결과 국민당 잔여 세력 소탕에 주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교는 부차적인 대상이었다.
1955년 반둥회의에서 아시아 신흥 국가들의 화교 화인이 중국의 제 5열이라는 우려가 분출하고, 이를 불식하기 위해서 중국은 기존의 화교 정책 포기를 선포한다. 중국의 입장에서 계속 해외화교에 관여하면 중국과 주변 국가 간의 외교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므로, 화교에게 충성심을 강조하는 것이 화교들이 거주국의 국적을 취득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1955년 중국과 인도네시아 간에 국적법 협정이 이루어지고, 화교는 오직 하나의 국적만 가질 수 있게 된다. 중국은 화교들이 거주국에 동화하여 장기생존하길 권했고, 귀국하는 인원도 감소하기를 원했다.
50년대 후반부터 반우파투쟁, 대약진, 문화대혁명이 전개되면서, 화교가 누리던 특권 대우가 박탈되었을 뿐 아니라, 화교 송금도 엄격한 통제 하에 놓이게 된다, 외국과의 관계 자체가 죄의 구실이 되던 시기에, 화교의 정치적 충성은 강렬한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사상개조가 필수 과정으로 간주된 것이다. 해외 화교 학교는 폐쇄되고, 화교 기구들도 업무를 중단하는 등 화교정책이 사실상 부재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반면 대만은 화교의 전폭적 지지 확보로 미국의 원조가 중단된 70년대에도 경제기적을 창조하는데 핵심 역량이 된다.
78년 공산당의 화교정책은 대전환을 맞는다. 다시 한 번 국민당을 모방하여 화교를 적극 활용하던 사이, 90년대부터 대만은 대만화와 탈중국화의 바람이 거세게 인다. ‘화교로 대만을 끌고, 화교로 외국을 끌어, 화교와 대만을 결합하는 방식’이 이 시기 공산당의 통전 전략으로 확립된다. 활발한 양안교류로 대만 자금을 포함하여 화교, 홍콩, 마카오의 자금과 인재, 기술을 중국 현대화에 동원한다는 것이다. 냉전기 대만이 구축한 화교 네트워크를 중국이 포섭하는 형태이다. 이는 단순히 경제 정책에 한정되지 않고 중국의 평화 통일 공세에도 활용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양안삼지와 화교사회를 아우르면서 대만의 독립노선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1998년 줄곧 중화민국을 지지하던 뉴욕의 화교단체는 중공기를 게양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몇 안 되는 대만과의 수교국이었던 파나마에서도 인공기가 올라간다. 2000년 민진당이 대선에서 승리하자, 수많은 화교 단체들이 취임식에 불참했음은 양안과 화교 사회가 또 한 번의 전환기에 들어섰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다. 중국은 이 흐름을 놓치지 않고 전통적인 반공 노선의 화교 단체들을 반대만 독립의 선봉 조직으로 탈바꿈하는데 적극적이다. 세계 각 지의 화교 단체들도 점점 더 중국으로 전향하고 있는 추세다. 화교 정책의 주도권이 대륙의 공산당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만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공산당의 침투를 우려하여, 대륙과의 인적 교류 또한 봉쇄한 상태였다. 특히 국민당 정부는 홍콩에 있는 지식인들이 ‘제 3세력’이라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 여론조사에서도 이들 지식인들이 공산당에는 결연히 반대하면서도, 결코 친국민당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난민 지식인들 또한 국민당이 통치하고 있는 대만으로 가기를 원치 않은 것이다. 대체로 미국이나 동남아를 선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미국 이민법 규정 상 1년에 화교 이민은 105명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동남아 각국에서도 화교에 대한 반감이 증폭되고 있었기에 난민 이주는 어려운 상태였다. 홍콩의 난민 지식인들이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던 가운데, 대만의 국민당 정부의 태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해외 화인들에게 정통 중국의 정체성을 승인받고 지지를 구하가 위해, 또 정치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 원지회와 합작하여 홍콩 지식인 이주를 허용하기로 한 것이다. 마침 대륙의 공산당이 홍콩에서 대만으로 간 중국인들이 핍박받고 있는다는 선전 공작을 하고 있었기에, 국민당이 주도적으로 이민을 허용하면 공산당의 선전 효과를 반감시키고 국제적 지위 향상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비용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미국의 개입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미국 정부는 원지회가 확보하고 있는 명단을 활용하여 동남아-화교-대만을 잇는 고리로 난민 지식인을 활용하기로 한다. 이로써 원지회의 소극적 원조 활동은 미국 정부의 주도 하에, 적극적인 난민 활용으로 진화한 것이다. 이들 지식인들의 출판물을 활용해서 홍콩, 마카오, 대만은 물론 동남아에서도 반공 교재로 활용한다. 난민 지식인을 통해 동남아 지역의 공산주의 침투를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 초 홍콩 서점가를 지배했던 대륙의 저렴한 공산주의 출판물을 대신하여 이들의 출판물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난민 지식인들 또한 반공 선전의 첨병이 되어 있었던 셈이다. 고등 교육을 받은 엘리트의 가치를 적극 활용하여 공산주의의 아시아 확산의 방패막으로 삼은 것이다.
(냉전형 학술동맹)
화교 정책의 현재
현재까지도 화교의 지지를 얻기 위한 양안 간의 경쟁은 끝나지 않았다. 특히 대만이 UN에서 퇴출되고,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으로 전환한 70년대 후반부터 역전 현상이 일기 시작한다. 통계 자료를 보면 화교, 화인사회가 점진적으로친국민당의 입장에서 중공 정책의 지지로 돌아서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고, 화교사무위원회는 11월에 설립된다. 1949-54년 동안 기본적으로 중국은 국민당의 화교 정책을 계승했다. 혈통주의 원칙에 입각한 국적법을 채용하고 해외 화인 모두를 중국 국민으로 간주한 것이다. 법률상으로도 화교의 참정권을 인정하고 있었고, 해외 화교의 보호를 정부의 중요 임무의 하나로 간주했다. 대외적으로 해외화교를 향해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선전 공작을 전개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측면에서 당시 중국의 정책 중점은 정권의 확립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을 비롯하여 주변 지역의 안보 위기 해결과 국민당 잔여 세력 소탕에 주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교는 부차적인 대상이었다.
1955년 반둥회의에서 아시아 신흥 국가들의 화교 화인이 중국의 제 5열이라는 우려가 분출하고, 이를 불식하기 위해서 중국은 기존의 화교 정책 포기를 선포한다. 중국의 입장에서 계속 해외화교에 관여하면 중국과 주변 국가 간의 외교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므로, 화교에게 충성심을 강조하는 것이 화교들이 거주국의 국적을 취득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1955년 중국과 인도네시아 간에 국적법 협정이 이루어지고, 화교는 오직 하나의 국적만 가질 수 있게 된다. 중국은 화교들이 거주국에 동화하여 장기생존하길 권했고, 귀국하는 인원도 감소하기를 원했다.
50년대 후반부터 반우파투쟁, 대약진, 문화대혁명이 전개되면서, 화교가 누리던 특권 대우가 박탈되었을 뿐 아니라, 화교 송금도 엄격한 통제 하에 놓이게 된다, 외국과의 관계 자체가 죄의 구실이 되던 시기에, 화교의 정치적 충성은 강렬한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사상개조가 필수 과정으로 간주된 것이다. 해외 화교 학교는 폐쇄되고, 화교 기구들도 업무를 중단하는 등 화교정책이 사실상 부재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반면 대만은 화교의 전폭적 지지 확보로 미국의 원조가 중단된 70년대에도 경제기적을 창조하는데 핵심 역량이 된다.
78년 공산당의 화교정책은 대전환을 맞는다. 다시 한 번 국민당을 모방하여 화교를 적극 활용하던 사이, 90년대부터 대만은 대만화와 탈중국화의 바람이 거세게 인다. ‘화교로 대만을 끌고, 화교로 외국을 끌어, 화교와 대만을 결합하는 방식’이 이 시기 공산당의 통전 전략으로 확립된다. 활발한 양안교류로 대만 자금을 포함하여 화교, 홍콩, 마카오의 자금과 인재, 기술을 중국 현대화에 동원한다는 것이다. 냉전기 대만이 구축한 화교 네트워크를 중국이 포섭하는 형태이다. 이는 단순히 경제 정책에 한정되지 않고 중국의 평화 통일 공세에도 활용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양안삼지와 화교사회를 아우르면서 대만의 독립노선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1998년 줄곧 중화민국을 지지하던 뉴욕의 화교단체는 중공기를 게양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몇 안 되는 대만과의 수교국이었던 파나마에서도 인공기가 올라간다. 2000년 민진당이 대선에서 승리하자, 수많은 화교 단체들이 취임식에 불참했음은 양안과 화교 사회가 또 한 번의 전환기에 들어섰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다. 중국은 이 흐름을 놓치지 않고 전통적인 반공 노선의 화교 단체들을 반대만 독립의 선봉 조직으로 탈바꿈하는데 적극적이다. 세계 각 지의 화교 단체들도 점점 더 중국으로 전향하고 있는 추세다. 화교 정책의 주도권이 대륙의 공산당으로 넘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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