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군부의 정치 퇴진에 관한 문헌 고찰 ··················································1
Ⅱ. 제5공화국의 성립 ············································································4
Ⅲ. 제5공화국의 전개과정과 붕괴 ···························································5
Ⅳ. 제5공화국의 긍정적 측면 ·································································6
1. 경제 성장과 물가 안정
2. 스포츠 육성
3. 전자통신정보사업의 육성
4. 각종 규제의 자율화
Ⅴ. 결론 ······························································································9
※ 참고문헌 ·························································································9
Ⅱ. 제5공화국의 성립 ············································································4
Ⅲ. 제5공화국의 전개과정과 붕괴 ···························································5
Ⅳ. 제5공화국의 긍정적 측면 ·································································6
1. 경제 성장과 물가 안정
2. 스포츠 육성
3. 전자통신정보사업의 육성
4. 각종 규제의 자율화
Ⅴ. 결론 ······························································································9
※ 참고문헌 ·························································································9
본문내용
림픽은 또한 한국의 문화를 세계 각국에 알리고 그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3. 전자통신정보사업의 육성
전두환 정권은 미래를 위한 산업정책도 충실하게 수행했다. 지금의 IT산업의 초석을 만든 게 전두환 정권이다.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을 충실히 이어 받아 계속 육성했으며, 미래를 위한 산업으로 전자산업과 정보통신사업을 육성했다. 이 당시 김재익 경제수석과 오명 장관, 전두환 대통령 3명이 의기투합하여 전자와 통신사업 육성에 힘을 올렸고, 브라운관 산업, 유선전화용 교환기, 통신케이블 전자교환기, 광통신인프라 분야는 비약적으로 성장을 하게 된다. 81년 전기통신 사업법을 고쳐 모든 통신사업자는 수입의 3%를 의무적으로 연구개발비에 쓰도록 법제화여, 연간 7-800억 원이 통신사업개발비로 투자되었다.
이 당시 청와대는 반도체 컴퓨터 전자교환기 부문을 3대 전략산업화하고 5년 이내에 전자부문의 생산 및 수출을 2.5배로 늘리겠다고 발표를 하였다. 하지만 발표 당시엔 정부관료 포함 많은 사람들이 비웃음을 받았다. 그러나 86년부터 전자사업은 우리나라 최대 주력산업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사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전자 사업의 주력 업종은 가전제품이었다. 그러나 기술축적과 각 산업분야에 파급효과가 큰 산업전자에 초점을 두고 통신장비 개발에 눈을 돌려 전전자식교환기(tdx)개발에 성공하여, 국산 tdx가 86년에 드디어 개통, 세계20번째 자체개발에 성공한 나라가 된다. tdx국산화 성공으로 전화가설이 손쉬워졌다. 결국 전화기 수출 세계 1위로를 기록하였고 후에 팩시밀리, 컴퓨터 등 정보통신이 가능해지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육성과 전두환 정권의 전자정보통신사업의 육성으로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100여 개의 신생국 중 유일하게 자국소유하의 종합적 공업화를 달성하게 된 것이다. 90년대 들어 중국이 있긴 하지만, 중국은 외국인 직접투자로 육성된 것인 반면, 한국은 한국인이 직접 소유하고 경영하는 형태로 산업화가 형성되었다.
4. 각종 규제의 자율화
전두환 정권은 과외를 금지시키고 본고사를 폐지와, 내신과 학력고사를 통한 대학진학조치를 실시하여, 일반 서민들에게 사교육비 부담을 대폭 덜어주었다. 그로 인해 비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학생들도 꾸준히 공부만 하면 명문 대학에 진학하여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마련되었다. 실제로 지방에서 서울대 두어 명 정도 배출하던 평범한 고등학교가 이 조치 이후로 50명이 넘는 서울대를 한 해 배출하여 단 숨에 지방명문고로 발돋움하기도 하였다. 많은 가난한 수험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꿈을 이뤘던 시대였다.
또한, 1945년 9월 25일 부산에서 처음 실시된 미군정 당국의 포고 제1호였던 야간통행금지는 1982년 1월 5일 해제되었으며 교복자율화, 두발 자율화와 같은 유화정책을 내놓기도 했다.
Ⅴ. 결론
한국 군부의 퇴진에는 세 가지의 중요한 요인이 존재하였다.
첫째, 군부정권에 대한 반대세력의 성장이었다. 1985년 2월의 국회의원 선거를 계기로 강화된 반대세력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에서 재야세력 및 중산층과 연계하여 그 세력을 더욱 확대시켰고, 1987년 6. 10 항쟁을 통하여 군부정권에 단안을 내리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둘째, 군부정권은 6. 29 선언을 통하여 반대세력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권위주의 군부통치로부터 민주적 정부로의 국가주도의 퇴진과정을 정식으로 시작하였다.
셋째,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성공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한 국민들의 생활수준 향상, 교육기회 확대, 정치적 참여에의 요구확대 등은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적 군부통치에 대한 불만을 증대시켰고 더 이상은 성공적인 경제성과가 군부정권의 정통성을 유지하여 주는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전두환과 제5공화국 정부는 정권에 대한 야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 어떤 정통성이나 정당성도 찾을 수 없는 오직 개인의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민주화 운동이지만, 그들의 숭고한 정신과 노력으로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를 누리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 참고문헌
서경고, 『군부의 정치퇴진에 관한 비교 연구』, 1994
김운태 외 공저, 『한국정치론』, 박영사, 1999
김영명, 『고쳐쓴 한국현대정치사』, 을유문화사, 1999
김영명, 『한국의 정치변동』, 을유문화사, 2006
한정일, 『한국정치사회변동론』, 도서출판 아침, 2004
3. 전자통신정보사업의 육성
전두환 정권은 미래를 위한 산업정책도 충실하게 수행했다. 지금의 IT산업의 초석을 만든 게 전두환 정권이다.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을 충실히 이어 받아 계속 육성했으며, 미래를 위한 산업으로 전자산업과 정보통신사업을 육성했다. 이 당시 김재익 경제수석과 오명 장관, 전두환 대통령 3명이 의기투합하여 전자와 통신사업 육성에 힘을 올렸고, 브라운관 산업, 유선전화용 교환기, 통신케이블 전자교환기, 광통신인프라 분야는 비약적으로 성장을 하게 된다. 81년 전기통신 사업법을 고쳐 모든 통신사업자는 수입의 3%를 의무적으로 연구개발비에 쓰도록 법제화여, 연간 7-800억 원이 통신사업개발비로 투자되었다.
이 당시 청와대는 반도체 컴퓨터 전자교환기 부문을 3대 전략산업화하고 5년 이내에 전자부문의 생산 및 수출을 2.5배로 늘리겠다고 발표를 하였다. 하지만 발표 당시엔 정부관료 포함 많은 사람들이 비웃음을 받았다. 그러나 86년부터 전자사업은 우리나라 최대 주력산업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사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전자 사업의 주력 업종은 가전제품이었다. 그러나 기술축적과 각 산업분야에 파급효과가 큰 산업전자에 초점을 두고 통신장비 개발에 눈을 돌려 전전자식교환기(tdx)개발에 성공하여, 국산 tdx가 86년에 드디어 개통, 세계20번째 자체개발에 성공한 나라가 된다. tdx국산화 성공으로 전화가설이 손쉬워졌다. 결국 전화기 수출 세계 1위로를 기록하였고 후에 팩시밀리, 컴퓨터 등 정보통신이 가능해지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육성과 전두환 정권의 전자정보통신사업의 육성으로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100여 개의 신생국 중 유일하게 자국소유하의 종합적 공업화를 달성하게 된 것이다. 90년대 들어 중국이 있긴 하지만, 중국은 외국인 직접투자로 육성된 것인 반면, 한국은 한국인이 직접 소유하고 경영하는 형태로 산업화가 형성되었다.
4. 각종 규제의 자율화
전두환 정권은 과외를 금지시키고 본고사를 폐지와, 내신과 학력고사를 통한 대학진학조치를 실시하여, 일반 서민들에게 사교육비 부담을 대폭 덜어주었다. 그로 인해 비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학생들도 꾸준히 공부만 하면 명문 대학에 진학하여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마련되었다. 실제로 지방에서 서울대 두어 명 정도 배출하던 평범한 고등학교가 이 조치 이후로 50명이 넘는 서울대를 한 해 배출하여 단 숨에 지방명문고로 발돋움하기도 하였다. 많은 가난한 수험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꿈을 이뤘던 시대였다.
또한, 1945년 9월 25일 부산에서 처음 실시된 미군정 당국의 포고 제1호였던 야간통행금지는 1982년 1월 5일 해제되었으며 교복자율화, 두발 자율화와 같은 유화정책을 내놓기도 했다.
Ⅴ. 결론
한국 군부의 퇴진에는 세 가지의 중요한 요인이 존재하였다.
첫째, 군부정권에 대한 반대세력의 성장이었다. 1985년 2월의 국회의원 선거를 계기로 강화된 반대세력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에서 재야세력 및 중산층과 연계하여 그 세력을 더욱 확대시켰고, 1987년 6. 10 항쟁을 통하여 군부정권에 단안을 내리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둘째, 군부정권은 6. 29 선언을 통하여 반대세력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권위주의 군부통치로부터 민주적 정부로의 국가주도의 퇴진과정을 정식으로 시작하였다.
셋째,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성공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한 국민들의 생활수준 향상, 교육기회 확대, 정치적 참여에의 요구확대 등은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적 군부통치에 대한 불만을 증대시켰고 더 이상은 성공적인 경제성과가 군부정권의 정통성을 유지하여 주는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전두환과 제5공화국 정부는 정권에 대한 야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 어떤 정통성이나 정당성도 찾을 수 없는 오직 개인의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민주화 운동이지만, 그들의 숭고한 정신과 노력으로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를 누리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 참고문헌
서경고, 『군부의 정치퇴진에 관한 비교 연구』, 1994
김운태 외 공저, 『한국정치론』, 박영사, 1999
김영명, 『고쳐쓴 한국현대정치사』, 을유문화사, 1999
김영명, 『한국의 정치변동』, 을유문화사, 2006
한정일, 『한국정치사회변동론』, 도서출판 아침,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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