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립운동사 조사 - 박용만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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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독립운동사 조사 - 박용만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Ⅰ. 머리말 ………………………………………………………………………… 1

Ⅱ. 기존 연구 논지 소개 ………………………………………………… 2

Ⅲ. 의문제시 및 대안 …………………………………………………… 4

Ⅳ. 맺음말 ……………………………………………………………………… 6

Ⅴ. 참고문헌 ……………………………………………………………………8

본문내용

단 이후 독립운동세력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뭉쳐지게 되었으며, 광복 이후 임시정부 중심으로 남한을, 사회주의계열 중심으로 북한을 각각 장악하게 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 경합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거들을 종합하였을 때 박용만 암살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사를 새로운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독립운동사는 광복 후 남북 양 정부의 정당성 확보를 위하여 연구되어 왔다. 때문에, 남한에서는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규정하고 임시정부의 관점에서 연구해왔으며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항일투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이러한 양 정치세력의 독립운동에 대한 상반된 시각에서부터 독립운동의 과정은 단순히 항일이라는 하나의 목표만으로 규정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독립운동이라 함은 억압민족이 피억압민족에 대응하여 펼치는 해방운동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억압민족, 즉 일제라는 당시의 정권세력에 대응하는 야권 세력으로 독립운동세력을 이해할 필요 또한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세력은 그들의 성향과 추구하는 가치관에 따라 서로 다른 조직으로 구성이 되고 서로의 세력을 견제해 왔다. 뭐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가 아니라 그들 자체적으로 추구하는 이상향을 향한 광복이 목표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박용만은 당시 가장 강력한 야권의 중심이었던 임시정부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인물이었다. 같은 독립운동 활동을 펼치는 동지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가치관 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정치적 경쟁 상대였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의문점들과 해석들을 통하여 결과적으로 박용만의 암살사건은 단순한 한 독립운동가의 비극적인 최후가 아니라 독립운동사의 이면에 감춰져 온 정치적 경쟁과정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봐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독립운동은 주로 항일의 의미에서 해석되어 왔다. 적은 오로지 일제이며 일제를 처단하기 위한 모든 일련의 과정들을 정리하는 것이 독립운동사의 궁극적인 방향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박용만 암살사건과 같이 독립운동세력 간의 정치적 암투 또한 존재했으며 이 과정이 그 자체로 부정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를 거치면서 조금씩 통합된 독립운동의 실체를 구성해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과정 없이 독립운동세력이 하나로 뭉치고 항일운동을 펼쳐 광복을 이뤘다는 것은 역사라기보다는 일종의 신화이고 드라마에 가까울 것이다.
정리하자면, 박용만의 암살사건은 일제의 이간책에 넘어간 임시정부의 오인판단으로 인한 사고라고 보기 보다는 독립운동세력이 하나로 규합되는 정치적 과정에서 발생한 대립이 만든 사건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Ⅳ. 맺음말
논문의 시작에 있어서 박용만이라는 흥미로운 독립운동가의 의문투성이인 최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찾아보고자 함이 이 글의 목적임을 밝혔다. 결과적으로 박용만의 죽음은 기존의 연구가 바라봤듯이 단순히 일제의 계략에 의한 비극도, 배경식의 연구에서 바라봤듯이 박용만이라는 인물적 특성의 결함이 불러온 참사도 아니었다. 박용만의 죽음은 독립운동의 중심세력을 통합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적 알력다툼이 낳은 정치적 비극이었다. 단지 박용만 뿐이 아니라 이렇듯 정치적 대립으로 최후를 맞이한 독립운동가들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 가운데는 박용만 만큼 굵직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기에 아직도 민족의 반역자로 남아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결국 독립운동사라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좌편향이나 우편향의 문제 뿐 아니라, 긍정적인 면만 바라보려는 주관적 편향성이 개입햇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는 항상 정치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을 찾아오려는 자의 대립으로 구성된다. 민주주의가 자리 잡았다는 오늘날에도 전 세계는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을 가져오려는 자의 대립으로 흘러가고 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독립운동사를 억압민족인 일제와 피억압민족인 한반도의 해방운동 과정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박용만 암살사건이 보여주듯이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은 독립운동세력 내부에서도 주도층과 반대층이 존재했고, 이들 사이의 정치적 분열과 경쟁, 그리고 통합의 과정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러한 시각이 제시되지 못 한 것은 독립운동이라는 숭고한 움직임의 진의를 해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한 편으로는 광복 이후의 정권을 지닌 세력들이 그들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 독립운동사를 활용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박용만 암살 당시에 강력하게 김구를 비판했던 이승만 조차도 이승만과 박용만이 과거 의형제였으며, 박용만 암살사건 시점에서는 이미 갈라선 사이임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이승만 또한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에 대응하여 주도권을 쥐기 위한 경쟁을 하는 상황이었고, 박용만의 죽음은 이러한 정쟁을 위한 좋은 요소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에 오르고도 그에 대한 평가를 미뤘던 것이다. 박용만의 죽음은 그 자체를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세력 간의 암투와 정쟁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밖에 없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들 내부에서의 정치적 경쟁과정 또한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사는 신화가 아니라 실제이다. 독립운동이라는 위대한 과정에 있어서 실존했던 각종 세력간의 통합와 분열, 경쟁을 보다 본질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독립운동사의 역사적 가치와 그들이 흘린 피가 후대에 이르러 올바르지 못 한 방향으로 악용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Ⅴ. 참고문헌
◎김도훈, 「박용만 : 미 대륙의 항일투쟁론자」, 2010. 12. 15.
◎오인철, 「박용만과 독립군단」, 1999.
◎배경식,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 박용만 암살사건 : 공개처형인가, 암살인가?」,
2007. 10.
◎중앙일보사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1928년 11월
20일자 편지, 1998,
◎이상목, 「박용만과 그의 시대」, 2010. 9. 4~2011. 2. 21
◎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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