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감옥
* 규율
* 감시
* 처벌
* 시험
* 일망 감시방법
* 규율
* 감시
* 처벌
* 시험
* 일망 감시방법
본문내용
대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현재 자신의 위치를 되새기게 해주는 훌륭한 이론임에 틀림없다.
특히 일망 감시시설 같은 것은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굳이 특정한 시설에 사람을 가두어두지 않고서도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권력기관이 수집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 미국의 국가 정보기관은 비밀리에 인터넷을 통해 세계 각국의 정보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사용하는 모든 개인들의 정보까지 수집한다고 한다. 그러한 뒷받침하는 사례로 스웨덴이 자국의 사회 정책을 위하여 미국에서 정보를 사갔다는 것이다. 정말 권력에 의해 개인들의 감시가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권력에 더욱 철저히 예속되어 권력자들의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 이 글을 접하고 이러한 그의 주장을 바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나는 누구보다도 권력이 마련한 제도 속에서 규율을 철저히 지켰고 이미 마음속에 감시자의 눈을 내면화시켜 스스로 행동을 통제하는 단계까지 다다른 셈이 된다. 따라서 내가 푸코의 주장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푸코에 의하면 인간과학은 개체들을 인식론적 장안에 적절하게 배치시키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렇게 정리분류된 기록은 권력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개체를 길들이고 유용하게 만드는데 최대한 힘을 쓸 뿐이다. 푸코는 어떤 사회에서도 사회적 신체를 구성하고 특질화 하는 다양한 권력관계가 있는데 이러한 권력관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담론의 생산과 축적, 유통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권력은 진리를 생산함으로써 작용한다. 그는 이런 바탕에서 인간과학과 권력의 공모관계를 지적한다. 그는 권력이 지식의 전제조건이며 권력과 무관하거나 권력을 목표로 삼지 않는 순수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하지만 푸코의 이러한 생각에 맞추어 우리의 인식의 틀을 바꾸는 것도 그가 형성해 놓은 담론의 권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 아닐까? 물론 막강한 사회의 영향력을 인식하기 위해서 그의 주장을 다시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전적으로 다른 사회, 다른 세계관을 산출하기 위해 이러한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니다. 단지 근대 이후부터 이어져 온 인권과 자유의 신장 이면에 숨겨져 있는 권력의 힘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현실을 극복할 만한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저서에서 사용한 계보학적 탐구방법에 사용된 자료들이 신빙성을 가지기 힘든 비공식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새로운 문제제기와 그를 통한 비주류적인 소재들을 인간 학문에 있어서 아류적인 것으로부터 차용해왔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아류에 치우친 결과 정통 자료에 대해서는 인색하게 굴었기 때문에 신빙성에 손상을 입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점이 있다고 해서 그의 주장을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다.
푸코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초역사적 보편적 질문을 던진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기존의 철학적 체계를 뒤흔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의 이론의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고 그의 이론으로 인간과 인간이 형성해 놓은 문화사회를 바라본 다는 것도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말에 대한 가치 평가는 무의미한 것이다. 오히려 그의 저서를 일상생활에서 현실에 매몰되지 않도록 비판적인 안목을 제시하는 하나의 교양서로 인식하는 것이 그의 주장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인 듯싶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책이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들고 다니면서 쓰여질 수 있는 연장통이 되기를 원한 푸코의 바람을 더욱 잘 반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책을 읽고 나서의 나의 느낌도 읽기전의 걱정과 같이 ‘어렵다’ 였다.
감옥이라는 것을 소재로 삼아 감옥의 역사와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특별한 느낌을 주기도 하였지만 솔직히 어렵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에 글을 정리를 하는데 있어 혼란도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푸코가 이 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자 하였던 것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감옥” 이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우리가 무심코 지나왔던 것들을 건드리고 있다. 이는 집합적 무의식과도 관련되는데, 우리가 사고하고 경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사고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 선험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들이다. 숨겨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눈앞에 있는데도 단지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감옥은 규율의 확산과 일반화, 곧 근대 “규율사회”의 형성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탄생했으며, 따라서 감옥의 사법화는 계몽적 사법제도에 대한 육체적 정치 기술로서의 규율의 승리, 새로운 처벌 양식으로서 규율의 성공적인 침투, 잠식 및 식민지화의 결과하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당시 계몽사회에서는 자연상태가 아니라 주도 면밀하게 맞물려있는 기계의 톱니바퀴에 있었으며, 원초적 사회 계약이 아니라 영속적인 강제에, 기본적 인권이 아니라 끝없이 자행되는 훈련 방식에, 그리고 일반의지가 아니라 자동적인 순종성에 있었다.
결국 표면적으로 권력은 그 위력을 점차 감소화 한 것처럼 보이지만, 푸코의 언어에 의하면 권력은 좀 더 세분화 한 미세 권력의 형태로서 우리 의 일상생활 어디에서나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동안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상주 하고 있었던 권력에 대한 재발견에 너무나 무심하였던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자율적 의사로 결정하였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권력의 작용에 대한 결과물로 대체된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우리가 흔히 우리의 능력을 평가받고자 행하고 있는 시험이라는 제도조차 우리를 권력에 의한 분류의 범주에 넣게 위함을 잊어 서는 안 된다.
결국 인간은 그의 유기적이고 자연적인 존재가 아닌, 권력에 의하여 분류되고, 평가받고, 규범화되면서 그 틀에 맞추어짐을 당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우리 주변에 상주 해있는, 우리가 기간 너무나 당연하게 넘어 왔던 것에 대하여 되짚어 볼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며 이글을 마친다.
특히 일망 감시시설 같은 것은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굳이 특정한 시설에 사람을 가두어두지 않고서도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권력기관이 수집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 미국의 국가 정보기관은 비밀리에 인터넷을 통해 세계 각국의 정보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사용하는 모든 개인들의 정보까지 수집한다고 한다. 그러한 뒷받침하는 사례로 스웨덴이 자국의 사회 정책을 위하여 미국에서 정보를 사갔다는 것이다. 정말 권력에 의해 개인들의 감시가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권력에 더욱 철저히 예속되어 권력자들의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 이 글을 접하고 이러한 그의 주장을 바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나는 누구보다도 권력이 마련한 제도 속에서 규율을 철저히 지켰고 이미 마음속에 감시자의 눈을 내면화시켜 스스로 행동을 통제하는 단계까지 다다른 셈이 된다. 따라서 내가 푸코의 주장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푸코에 의하면 인간과학은 개체들을 인식론적 장안에 적절하게 배치시키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렇게 정리분류된 기록은 권력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개체를 길들이고 유용하게 만드는데 최대한 힘을 쓸 뿐이다. 푸코는 어떤 사회에서도 사회적 신체를 구성하고 특질화 하는 다양한 권력관계가 있는데 이러한 권력관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담론의 생산과 축적, 유통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권력은 진리를 생산함으로써 작용한다. 그는 이런 바탕에서 인간과학과 권력의 공모관계를 지적한다. 그는 권력이 지식의 전제조건이며 권력과 무관하거나 권력을 목표로 삼지 않는 순수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하지만 푸코의 이러한 생각에 맞추어 우리의 인식의 틀을 바꾸는 것도 그가 형성해 놓은 담론의 권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 아닐까? 물론 막강한 사회의 영향력을 인식하기 위해서 그의 주장을 다시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전적으로 다른 사회, 다른 세계관을 산출하기 위해 이러한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니다. 단지 근대 이후부터 이어져 온 인권과 자유의 신장 이면에 숨겨져 있는 권력의 힘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현실을 극복할 만한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저서에서 사용한 계보학적 탐구방법에 사용된 자료들이 신빙성을 가지기 힘든 비공식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새로운 문제제기와 그를 통한 비주류적인 소재들을 인간 학문에 있어서 아류적인 것으로부터 차용해왔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아류에 치우친 결과 정통 자료에 대해서는 인색하게 굴었기 때문에 신빙성에 손상을 입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점이 있다고 해서 그의 주장을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다.
푸코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초역사적 보편적 질문을 던진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기존의 철학적 체계를 뒤흔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의 이론의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고 그의 이론으로 인간과 인간이 형성해 놓은 문화사회를 바라본 다는 것도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말에 대한 가치 평가는 무의미한 것이다. 오히려 그의 저서를 일상생활에서 현실에 매몰되지 않도록 비판적인 안목을 제시하는 하나의 교양서로 인식하는 것이 그의 주장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인 듯싶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책이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들고 다니면서 쓰여질 수 있는 연장통이 되기를 원한 푸코의 바람을 더욱 잘 반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책을 읽고 나서의 나의 느낌도 읽기전의 걱정과 같이 ‘어렵다’ 였다.
감옥이라는 것을 소재로 삼아 감옥의 역사와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특별한 느낌을 주기도 하였지만 솔직히 어렵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에 글을 정리를 하는데 있어 혼란도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푸코가 이 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자 하였던 것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감옥” 이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우리가 무심코 지나왔던 것들을 건드리고 있다. 이는 집합적 무의식과도 관련되는데, 우리가 사고하고 경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사고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 선험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들이다. 숨겨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눈앞에 있는데도 단지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감옥은 규율의 확산과 일반화, 곧 근대 “규율사회”의 형성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탄생했으며, 따라서 감옥의 사법화는 계몽적 사법제도에 대한 육체적 정치 기술로서의 규율의 승리, 새로운 처벌 양식으로서 규율의 성공적인 침투, 잠식 및 식민지화의 결과하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당시 계몽사회에서는 자연상태가 아니라 주도 면밀하게 맞물려있는 기계의 톱니바퀴에 있었으며, 원초적 사회 계약이 아니라 영속적인 강제에, 기본적 인권이 아니라 끝없이 자행되는 훈련 방식에, 그리고 일반의지가 아니라 자동적인 순종성에 있었다.
결국 표면적으로 권력은 그 위력을 점차 감소화 한 것처럼 보이지만, 푸코의 언어에 의하면 권력은 좀 더 세분화 한 미세 권력의 형태로서 우리 의 일상생활 어디에서나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동안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상주 하고 있었던 권력에 대한 재발견에 너무나 무심하였던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자율적 의사로 결정하였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권력의 작용에 대한 결과물로 대체된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우리가 흔히 우리의 능력을 평가받고자 행하고 있는 시험이라는 제도조차 우리를 권력에 의한 분류의 범주에 넣게 위함을 잊어 서는 안 된다.
결국 인간은 그의 유기적이고 자연적인 존재가 아닌, 권력에 의하여 분류되고, 평가받고, 규범화되면서 그 틀에 맞추어짐을 당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우리 주변에 상주 해있는, 우리가 기간 너무나 당연하게 넘어 왔던 것에 대하여 되짚어 볼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며 이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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