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
2. 손문(孫文)의 출생과 가족관계
3. 손문(孫文)의 어린시절
4. 손문(孫文)의 하와이에서의 생활
5. 손문(孫文)의 세례와 결혼
6. 홍중회의 결성
7. 삼민주의(三民主義)의 구상
8. 손문(孫文)과 일본과의 관계
9. 동맹회의 결성
10. 신해혁명(辛亥革命)
11. 제제의 망령
12. 중국의 5․4운동
13. 손문(孫文)의 죽음
2. 손문(孫文)의 출생과 가족관계
3. 손문(孫文)의 어린시절
4. 손문(孫文)의 하와이에서의 생활
5. 손문(孫文)의 세례와 결혼
6. 홍중회의 결성
7. 삼민주의(三民主義)의 구상
8. 손문(孫文)과 일본과의 관계
9. 동맹회의 결성
10. 신해혁명(辛亥革命)
11. 제제의 망령
12. 중국의 5․4운동
13. 손문(孫文)의 죽음
본문내용
ng, 1823년 2월 15일 ~ 1901년 11월 7일)은 청 말기의 한족계 중신으로 청의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사람이다. 태평천국의 난 이후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하였으나, 청일 전쟁을 계기로 실각하였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이 양성해놓은 신식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열강이 그를 후원해 주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정치력도 상당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는 북경에서의 정치 지배력을 구축하고 나자 손문(孫文)의 남경정부에 대해서 군사적 공격과 타협의 양면정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손문(孫文)은 황제의 퇴위와 공화제의 채택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그의 타협에 응하였다. 이리하여 청조는 당시 6세이던 ‘마지막 황제’ 부의가 퇴위함으로써 멸망하였고, 원세개는 동년 3월 대총통에 취임한다. 즉 중화민국의 정권은 손문(孫文)이 정당한 절차를 받아 시작하여 원세개로 넘어간 셈이었다. 손문/권오석 옮김, <<삼민주의>>, 홍신문화사, 1995 제제의 망령 p20~23.
12. 중국의 54운동
1919년의 54운동은 중국 현대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현대중국 혁명시대의 출발이었고,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반제국반군벌주의적 성격이었으며, 제일차세계대전으로 나타난 불온한 새 세력에 대한 중국 인민의 대응을 뜻하였다. 베르사이유 평화조약의 중국관계 조항과 일본의 악명 높은21개 요구조건에 반발하여 1919년 5월 4일 거대한 학생데모가 북경에서 벌어져 친일 북경정부를 비판하였다. 이 혁명적인 물결은 곧 전 중국에 확산되어 대중의식의 급격한 성장과 문화변동을 선도하여 1921년 중국공산당의 설립, 1924년 국민장의 개조, 국공합작의 연합전선 형성으로 그 극에 달했다. 54운동은 그 반향과 파급된 영향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운동 그 자체를 정의해석평가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다. 그 주된 논쟁거리는 진정한 본질과 성격에 대한 정의, 실제 행동 지도자의 확인, 그 범위와 성과에 대한 실제적인 평가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적인 선언, 정치적 연계, 직업적인 이해관계 등은 운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객관성을 너무 자주 흐리게 하고, 그에 따라 그 해석까지도 그렇게 되어 버린다. 손문(孫文)에 대표되는 국민당계의 이 운동에 대한 견해는 계급 구분을 강조하지 않는다. 손문(孫文)은 54운동과 신문화운동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모택동과 같지만, 그의 처음부터 이 운동을 학생들의 애국운동, 그리고 당시의 문화적 지적 운동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손문(孫文)의 54운동에 대한 긍정과 부정은 순전히 정치적 입장에서였다. 첫째로 1919년까지는 그의 당이 정치적으로 무력해 있었고, 크게 활성화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는 통감하고 있었다. 54운동의 애국청년은 그의 비능률적인 당에 새로운 세력기반을 형성하는 데 충원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제외하고는 그의 1924년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마음속으로부터 반대함으로써 54운동에 대한 긍정적 견해를 실질적으로 뒤바꾸기 전에도 운동의 공적에 대해서는 사실상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학생들의 역할에 대한 그 생각은 신문화운동의 지도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손문/권오석 옮김, <<삼민주의>>, 홍신문화사, 1995 5.4운동 p23~25.
13.손문(孫文)의 죽음
손문(孫文)의 목숨을 앗아간 간장병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발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치명적인 질환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누울때까지 언제나 뛰어난 정력으로 분주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즉, 그는 모든 정력을 그의 취미인 혁명운동에 쏟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간장 질환이라는 진단이 내려진 것은 1924년 12월 31일이며, 수술을 받자 극도로 악화된 간장암인 것을 알게 된 것은 1925년 1월 26일이었다. 모든 의사들은 절망에 빠졌으며 주위의 사람들은 초근목피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동년 2월 18일에 손문(孫文)을 국민당 본부로 옮겨 각종의 치료를 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드디어 1925년 3월 12일 오전 9시 반에 60세로서 숨을 거두었다. <<孫文의 生涯와 三民主義>>, 박영사, 1974 손문의 性格과 그의 죽음 p120~126.
참고문헌
-<<孫文의 生涯와 三民主義>>, 박영사, 1974
-손문/권오석 옮김, <<삼민주의>>, 홍신문화사, 1995
-제프리 바로/김한경 옮김, <<손문>>, 대현출판사, 1990
이 양성해놓은 신식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열강이 그를 후원해 주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정치력도 상당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는 북경에서의 정치 지배력을 구축하고 나자 손문(孫文)의 남경정부에 대해서 군사적 공격과 타협의 양면정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손문(孫文)은 황제의 퇴위와 공화제의 채택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그의 타협에 응하였다. 이리하여 청조는 당시 6세이던 ‘마지막 황제’ 부의가 퇴위함으로써 멸망하였고, 원세개는 동년 3월 대총통에 취임한다. 즉 중화민국의 정권은 손문(孫文)이 정당한 절차를 받아 시작하여 원세개로 넘어간 셈이었다. 손문/권오석 옮김, <<삼민주의>>, 홍신문화사, 1995 제제의 망령 p20~23.
12. 중국의 54운동
1919년의 54운동은 중국 현대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현대중국 혁명시대의 출발이었고,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반제국반군벌주의적 성격이었으며, 제일차세계대전으로 나타난 불온한 새 세력에 대한 중국 인민의 대응을 뜻하였다. 베르사이유 평화조약의 중국관계 조항과 일본의 악명 높은21개 요구조건에 반발하여 1919년 5월 4일 거대한 학생데모가 북경에서 벌어져 친일 북경정부를 비판하였다. 이 혁명적인 물결은 곧 전 중국에 확산되어 대중의식의 급격한 성장과 문화변동을 선도하여 1921년 중국공산당의 설립, 1924년 국민장의 개조, 국공합작의 연합전선 형성으로 그 극에 달했다. 54운동은 그 반향과 파급된 영향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운동 그 자체를 정의해석평가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다. 그 주된 논쟁거리는 진정한 본질과 성격에 대한 정의, 실제 행동 지도자의 확인, 그 범위와 성과에 대한 실제적인 평가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적인 선언, 정치적 연계, 직업적인 이해관계 등은 운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객관성을 너무 자주 흐리게 하고, 그에 따라 그 해석까지도 그렇게 되어 버린다. 손문(孫文)에 대표되는 국민당계의 이 운동에 대한 견해는 계급 구분을 강조하지 않는다. 손문(孫文)은 54운동과 신문화운동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모택동과 같지만, 그의 처음부터 이 운동을 학생들의 애국운동, 그리고 당시의 문화적 지적 운동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손문(孫文)의 54운동에 대한 긍정과 부정은 순전히 정치적 입장에서였다. 첫째로 1919년까지는 그의 당이 정치적으로 무력해 있었고, 크게 활성화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는 통감하고 있었다. 54운동의 애국청년은 그의 비능률적인 당에 새로운 세력기반을 형성하는 데 충원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제외하고는 그의 1924년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마음속으로부터 반대함으로써 54운동에 대한 긍정적 견해를 실질적으로 뒤바꾸기 전에도 운동의 공적에 대해서는 사실상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학생들의 역할에 대한 그 생각은 신문화운동의 지도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손문/권오석 옮김, <<삼민주의>>, 홍신문화사, 1995 5.4운동 p23~25.
13.손문(孫文)의 죽음
손문(孫文)의 목숨을 앗아간 간장병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발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치명적인 질환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누울때까지 언제나 뛰어난 정력으로 분주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즉, 그는 모든 정력을 그의 취미인 혁명운동에 쏟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간장 질환이라는 진단이 내려진 것은 1924년 12월 31일이며, 수술을 받자 극도로 악화된 간장암인 것을 알게 된 것은 1925년 1월 26일이었다. 모든 의사들은 절망에 빠졌으며 주위의 사람들은 초근목피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동년 2월 18일에 손문(孫文)을 국민당 본부로 옮겨 각종의 치료를 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드디어 1925년 3월 12일 오전 9시 반에 60세로서 숨을 거두었다. <<孫文의 生涯와 三民主義>>, 박영사, 1974 손문의 性格과 그의 죽음 p120~126.
참고문헌
-<<孫文의 生涯와 三民主義>>, 박영사, 1974
-손문/권오석 옮김, <<삼민주의>>, 홍신문화사, 1995
-제프리 바로/김한경 옮김, <<손문>>, 대현출판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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