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독립과 프랑스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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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독립과 프랑스혁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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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naparte, 1769~1821)이다. 1795년 10월 양원제 입법부와 5명의 총재를 둔 총재정부(Dorectoire)가 수립되었다. 총재정부는 중도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부르주아의 안정적 지배를 위해 노력했다. 총재정부가 수립된 후 나폴레옹은 1796년 5월 바뵈프(Gracchus Babeuf)와 같은 극단적인 평등주의자들의 내부소요를 진압하고 외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독일 남부에 있던 프랑스의 주력부대가 오스트리아 공격에 실패했을 때 나폴레옹은 북 이탈리아에서 성공을 거두고 오스트리아로 진격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황제와 1797년 10월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조약을 맺음에 따라 라인강을 국경으로 정하여 벨기에를 프랑스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제노아와 밀라노에 ‘자매공화국’을 건설했다. 나폴레옹은 1798년 이집트에서 영국을 공격하여 육지에서 성공했으나 프랑스 해군은 넬슨 제독에게 패배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오스트리아, 러시아, 나폴리, 포르투갈, 터키와 재차 동맹을 맺었다. 이 제2차 대불동맹은 프랑스를 위협했고, 때마침 불경기가 지속되면서 1799년 프랑스 내정이 흔들리고 총재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갔다. 이와 같은 대외적인 위기와 좌파의 압력에 시에예스는 1799년 부뤼메르(Brumaire) 18일(11월 9일)에 이집트에서 귀국한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했다. 나폴레옹은 보수파 정치인, 군인, 부유한 시민들과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2) 제1제정(1804)
총재정부가 무너지고 나폴레옹을 비롯하여 뒤코와 시에예스 등 3명의 콘술(consul) 정치가 성립되었다. 공화력 8년(1800)의 헌법으로 나폴레옹은 3명 중 10년 임기의 제 1콘술이 되었다. 그리고 공화력 10년(1802)의 헌법으로 그는 종신콘술이 되었으며 다시 공화력 12년(1804)의 헌법으로는 황제가 되었다. 제정체제와 그 정책의 기본 방향은 사실상 혁명력 8년 이래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폴레옹 황제
1800년 시에예스에 의해 주도된 헌법이 공포됨에 따라 나폴레옹은 제1 콘술로서 혁명이 끝났음을 선포했다. 입법의회의 권한을 국민의회가 장악하게 함으로써 반대파들이 형성되기도 했다. 제 1콘술이 재판관, 관료, 장교에 대한 임명권을 행사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군사력에 의한 것이었고, 그것은 옛 자코뱅 출신의 나폴레옹이 대중적 군사독재에 민주적인 성격을 부여한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도 프랑스인들은 평화를 요구했다. 뤼네빌(1801)과 아미앵(1802)에서 오스트리아 및 영국과 차례로 맺은 화평은 나폴레옹의 국내에서의 입지를 강화했다. 뿐만 아니라 1801년의 정교협약으로 가톨릭교를 프랑스인 대다수의 종교로 인정하여 교황과의 다툼을 끝냈다. 국가는 사제에게 봉급을 지급해야 했고, 교회의 재산은 국유화되었다. 그리고 법전들의 편찬으로 법률의 통일성이 달성되었다. 그 가운데 「민법전 Code Civil」(1804)은 시민들의 법 앞에서의 평등과 시민의 재산권에 대해 재천명했다. 그리고 남편과 아버지의 권리가 강화되었으나 장자 상속권은 폐지되었다.
행정구역은 여전히 도(道)로 유지되었지만, 파리에서 임명하는 도지사를 두어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교육은 주로 관료 교육을 목적으로 중등교육이 실시되었다. 그래서 초등교육이 무시되었고 대학은 1808년의 제국대학이 창설되어 중앙집권이 강화되었다. 프랑스 경제는 1800년 2월의 프랑스 은행 설립, 1803년의 제르미날 프랑화(貨) 제정 등으로 통화가 안정되면서 활력을 찾았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계승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그의 궁정은 베르사유의 화려함과 제정 로마의 장려함을 합쳐놓은 것이었다.
3) 나폴레옹의 몰락
나폴레옹은 전쟁의 영웅으로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아우스테릴리츠(1805), 예나(1806), 프리틀란트(1807), 바그람(1809) 등의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무너뜨리고 중부유럽을 순식간에 정복하여 북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했다. 그리고 러시아를 제어하면서 스페인과 스웨덴을 굴복시켰다. 그러나 그가 격파한 것은 구체제의 군대였다.
영국은 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1803년 5월부터 서인도 제도와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에 대한 프랑스의 침입을 비난했다. 영국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상대로 넬슨 제독이 지휘한 트라팔가르 해전(1805년 10월)에서 승리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했다. 프랑스는 해군력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최대조치는 1806년 11월 21일 베를린 정복 후 발표한 대륙봉쇄령이었다. 이 봉쇄령은 1806년 9월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제4차 대불 대동맹 체제를 와해시키고 영국의 대(對)유럽 접근로를 차단하여 영국경제에 타격을 주고 영국을 고립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130개의 도로 나누었고,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소멸되고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보호 하에 놓이는 라인 연방(1806)이 대신 들어섰다. 대륙 국가들은 대부분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의 동맹세력이었다. 정복한 많은 나라들의 시민 및 민중세력이 처음에는 나폴레옹을 환영했지만 시간이 흘러 프랑스의 지배가 확대됨에 따라 저항세력이 점점 더 커져갔다. 그 징후는 1808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원정 때 나타났다. 영국과 포르투갈에 의해서 지원받는 스페인 민중세력은 게릴라 작전으로 프랑스군을 밀어냈다. 1812년 러시아 원정 때도 역시 러시아 민중은 차르의 군대를 도왔고, 혹독한 겨울 날씨를 못 이긴 나폴레옹 군대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유럽 각국은 1813년 제5차 대불 동맹이 맺고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를 패퇴시켰다. 동맹군은 후퇴하는 나폴레옹을 좇아 1814년 3월 파리를 함락시켰다. 그 해 4월 11일 나폴레옹은 퇴위되어 5월 4일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를 왕으로 하는 부르봉 왕조가 복귀했다. 민족적인 운동이 프랑스 혁명을 추동하는 힘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프랑스에 대항하여 뒤돌아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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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4.14
  • 저작시기2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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