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파리와 프라하의 선정이유
2. 프랑스의 수도, 패션의도시 ‘파리’
3. 체코의 수도, 유럽의 심장 ‘프라하’
4. 나의 의견 (파리와 프라하의 비교)
5. 참고 자료
2. 프랑스의 수도, 패션의도시 ‘파리’
3. 체코의 수도, 유럽의 심장 ‘프라하’
4. 나의 의견 (파리와 프라하의 비교)
5. 참고 자료
본문내용
22번지의 작은 집에서 매일 글을 쓰고, 밤이 되어서야 자신의 하숙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프라하성에서 모티프를 얻어 쓴 작품 《성》도 이때 완성한 것이다. 골목 위로 올라가면 장난감 박
물관과 고딕양식으로 지은 높이 100m의 성비투스 대성당이 있다.
- 성비투스 대성당
프라하성 중앙에 있다. 1344년 카를 4세 때 착공하여 1929년에야 완공되었다. 최초의 설계자는 프랑스 출신의 건축가 마티아스였다. 그가 1352년 숨을 거두자 당시 23세의 페터 파를러가 뒤를 이었고, 이 후 파를러의 아들과 또 다른 건축가들이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갔다. 공사는 후스의 종교개혁 때 잠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되었다. 16세기 중엽 르네상스식 첨탑이 완공되고, 17세기에 양파 모양의 바로크식 지붕이 모습을 드러냈다. 1753∼1775년 사이에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신 고딕 양식의 완성된 형태를 갖추었다. 성당의 규모는 길이 124m, 폭 60m, 천장 높이 33m, 첨탑 높이 100m에 이른다. 정문 바로 위를 장식한 지름 10.5m의‘장미의 창’이 인상적이다. 성당 안쪽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기법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알폰스 무하가 제작한 아르누보 양식의 작품이다. 성당 지하에는 역대 체코 왕들의 석관묘가 안치되어 있으며, 본당 주위에는 체코의 수호성인 성 바츨라프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화려한 예배당이 있다. 예배당의 벽면은 보석과 도금으로 장식되었고, 여러 성인들과 성서 속 장면을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 에스타테 극장
모차르트 오페라‘돈지오반니’가 1787년 초연된 것으로 유명한 에스타테 극장은 보헤미아의 귀족 노스티츠 리네크 백작의 주도로 1783년에 설립되었다. 애국자였던 노스티츠 백작은 보헤미아 대중을 위한 극장이 생기길 간절히 기원했는데, 당시에는 귀족들이 자신의 저택 내에 오페라 극장을 갖고 있는 것이 유행이었다. 오페라 극장이 귀족들만의 전유물로 사용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노스티츠 백작은 일반 대중을 위한 극장을 만들 것을 주장했다. 지금도 극장의 정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Patrae et Music”라는 문구도 이러한 계몽정신이 깃든 것으로 “조국과 뮤즈(예술)을 위해”라는 뜻. 지어질 당시에는 틸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체코의 정치 격변 속에서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다. 에스타테라는 이름은 개관 후 15년이 지나 극장의 소유가 국유지 관리국으로 넘어가면서 붙여진 것으로, 당시의 공식 명칭은 왕립 국유지 관리국 극장이라는 뜻의 “Royal Theatre of the Estate"였다. 왕립이란 당시 체코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것으로, 독립 후에는 왕립이라는 이름을 삭제하고 에스타테 극장으로 불리게 되었고 국립극장 소속으로 바뀌었다. 모차르트와 연관이 깊은 덕분에 모차르트의 일생을 다룬 영화 ‘아마데우스’의 오페라 장면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지금은 오페라보다는 발레와 연극이 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 천문시계
프라하의 천문 시계는 15C 카를대학 수학 교수인 하스주가 만들었는데, 그 아름다움과 착상이 특이하다고 소문나자 다른 국가와 도시에서 그와 같은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쇄도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안 프라하 시청에서는 하스주 교수가 다시는 그와 같은 시계를 만들지 못하도록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너무나 슬픈 하스주 교수는 자기가 만든 시계를 만져보기 위하여 시계탑에 올라갔다. 하스주 교수가 시계를 만지자마자 멎어버려서 그 뒤 400년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후 시계가 다시 움직인 것은 1860년부터 라고 한다. 매시 정각이 되면 죽음의 신이 벨을 울리면서 12사도들이 두 개의 창문을 통과하여 한 번씩 나타난다. 마지막에는 닭이 울면서 시계가 시보를 나타내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이 재미있는 광경을 보기 위해 매시 정각이 되면 시계 주위는 사람들로 발을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가 된다고 한다.
- 춤추는 빌딩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해체주의적 건물로, 프랭크 게리의 1996년 작품이다. 체코 프라하의 블타바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프라하 나쇼날러(네덜란드생명)의 회사 건물로 사용되고 있고 왈츠를 추는 남녀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빌딩을 설계하였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4. 나의의견 (파리와 프라하의 비교)
드라마를 통해서 알게 된 2개의 도시들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 가장 크게 느낀 점은 파리와 프라하는 매우 비슷한 점이 많았다. 파리는 프라하보다 인위적인 건물들이 더 많았다. 한편 프라하는 인위적인 건물이 적지만, 여러 건물에 중세적인 아름다움이 많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지만 프라하와 파리 모두 옛 것과 현대물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도시 중의 하나였다. 수백 년 된 성당, 궁전 등에 대해 조사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과거와 현재가 어울려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해내고 있었다. 이로써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이야 말로 앞으로 도시가 더욱 발전 할 수 있는 필수 요소가 아닐까 싶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프라하와 파리는 앞으로도 충분한 발전의 소지가 있는 도시로 여겨진다. 이 두 개 도시의 건물의 자연스러운 미와 다양한 공연문화와 아름다운 관광지로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었는데, 옛 문화와 현재의 문화가 공존하여 보여주는 멋과 아름다움이 관광객들로 하여금 발길을 끊이지 않게 하는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와 프라하 중 각각 1개의 가고 싶은 곳을 뽑자면, 파리에는 오페라 극장을 프라하에는 춤추는 빌딩이다. 평소 나는 연극에 관심이 있던 지라 파리의 오페라 극장은 무대가 넓은 것으로 유명해 한번 가보고 싶은 곳 이다. 또한 프라하에는 춤추는 빌딩이 있는데, 이는 왈츠를 추는 두 남녀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하니 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겉은 비스듬하게 있어도 과연 건물 안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정말 궁금증이 생기게 된다.
5. 참고 자료
http://ko.wikipedia.org
http://www.naver.com
http://user.chollian.net
물관과 고딕양식으로 지은 높이 100m의 성비투스 대성당이 있다.
- 성비투스 대성당
프라하성 중앙에 있다. 1344년 카를 4세 때 착공하여 1929년에야 완공되었다. 최초의 설계자는 프랑스 출신의 건축가 마티아스였다. 그가 1352년 숨을 거두자 당시 23세의 페터 파를러가 뒤를 이었고, 이 후 파를러의 아들과 또 다른 건축가들이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갔다. 공사는 후스의 종교개혁 때 잠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되었다. 16세기 중엽 르네상스식 첨탑이 완공되고, 17세기에 양파 모양의 바로크식 지붕이 모습을 드러냈다. 1753∼1775년 사이에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신 고딕 양식의 완성된 형태를 갖추었다. 성당의 규모는 길이 124m, 폭 60m, 천장 높이 33m, 첨탑 높이 100m에 이른다. 정문 바로 위를 장식한 지름 10.5m의‘장미의 창’이 인상적이다. 성당 안쪽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기법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알폰스 무하가 제작한 아르누보 양식의 작품이다. 성당 지하에는 역대 체코 왕들의 석관묘가 안치되어 있으며, 본당 주위에는 체코의 수호성인 성 바츨라프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화려한 예배당이 있다. 예배당의 벽면은 보석과 도금으로 장식되었고, 여러 성인들과 성서 속 장면을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 에스타테 극장
모차르트 오페라‘돈지오반니’가 1787년 초연된 것으로 유명한 에스타테 극장은 보헤미아의 귀족 노스티츠 리네크 백작의 주도로 1783년에 설립되었다. 애국자였던 노스티츠 백작은 보헤미아 대중을 위한 극장이 생기길 간절히 기원했는데, 당시에는 귀족들이 자신의 저택 내에 오페라 극장을 갖고 있는 것이 유행이었다. 오페라 극장이 귀족들만의 전유물로 사용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노스티츠 백작은 일반 대중을 위한 극장을 만들 것을 주장했다. 지금도 극장의 정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Patrae et Music”라는 문구도 이러한 계몽정신이 깃든 것으로 “조국과 뮤즈(예술)을 위해”라는 뜻. 지어질 당시에는 틸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체코의 정치 격변 속에서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다. 에스타테라는 이름은 개관 후 15년이 지나 극장의 소유가 국유지 관리국으로 넘어가면서 붙여진 것으로, 당시의 공식 명칭은 왕립 국유지 관리국 극장이라는 뜻의 “Royal Theatre of the Estate"였다. 왕립이란 당시 체코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것으로, 독립 후에는 왕립이라는 이름을 삭제하고 에스타테 극장으로 불리게 되었고 국립극장 소속으로 바뀌었다. 모차르트와 연관이 깊은 덕분에 모차르트의 일생을 다룬 영화 ‘아마데우스’의 오페라 장면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지금은 오페라보다는 발레와 연극이 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 천문시계
프라하의 천문 시계는 15C 카를대학 수학 교수인 하스주가 만들었는데, 그 아름다움과 착상이 특이하다고 소문나자 다른 국가와 도시에서 그와 같은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쇄도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안 프라하 시청에서는 하스주 교수가 다시는 그와 같은 시계를 만들지 못하도록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너무나 슬픈 하스주 교수는 자기가 만든 시계를 만져보기 위하여 시계탑에 올라갔다. 하스주 교수가 시계를 만지자마자 멎어버려서 그 뒤 400년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후 시계가 다시 움직인 것은 1860년부터 라고 한다. 매시 정각이 되면 죽음의 신이 벨을 울리면서 12사도들이 두 개의 창문을 통과하여 한 번씩 나타난다. 마지막에는 닭이 울면서 시계가 시보를 나타내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이 재미있는 광경을 보기 위해 매시 정각이 되면 시계 주위는 사람들로 발을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가 된다고 한다.
- 춤추는 빌딩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해체주의적 건물로, 프랭크 게리의 1996년 작품이다. 체코 프라하의 블타바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프라하 나쇼날러(네덜란드생명)의 회사 건물로 사용되고 있고 왈츠를 추는 남녀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빌딩을 설계하였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4. 나의의견 (파리와 프라하의 비교)
드라마를 통해서 알게 된 2개의 도시들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 가장 크게 느낀 점은 파리와 프라하는 매우 비슷한 점이 많았다. 파리는 프라하보다 인위적인 건물들이 더 많았다. 한편 프라하는 인위적인 건물이 적지만, 여러 건물에 중세적인 아름다움이 많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지만 프라하와 파리 모두 옛 것과 현대물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도시 중의 하나였다. 수백 년 된 성당, 궁전 등에 대해 조사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과거와 현재가 어울려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해내고 있었다. 이로써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이야 말로 앞으로 도시가 더욱 발전 할 수 있는 필수 요소가 아닐까 싶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프라하와 파리는 앞으로도 충분한 발전의 소지가 있는 도시로 여겨진다. 이 두 개 도시의 건물의 자연스러운 미와 다양한 공연문화와 아름다운 관광지로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었는데, 옛 문화와 현재의 문화가 공존하여 보여주는 멋과 아름다움이 관광객들로 하여금 발길을 끊이지 않게 하는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와 프라하 중 각각 1개의 가고 싶은 곳을 뽑자면, 파리에는 오페라 극장을 프라하에는 춤추는 빌딩이다. 평소 나는 연극에 관심이 있던 지라 파리의 오페라 극장은 무대가 넓은 것으로 유명해 한번 가보고 싶은 곳 이다. 또한 프라하에는 춤추는 빌딩이 있는데, 이는 왈츠를 추는 두 남녀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하니 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겉은 비스듬하게 있어도 과연 건물 안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정말 궁금증이 생기게 된다.
5. 참고 자료
http://ko.wikipedia.org
http://www.naver.com
http://user.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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