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켄 윌버 [무경계, No Boundary]
1. 나는 누구인가
2. 그것의 절반
3. 무경계 영토
4. 무경계 각성
5. 무경계 순간
6. 경계의 생성과 전개과정
7. 페르소나 수준 : 발견의 출발점
8. 켄타우로스 수준
9. 초월적 자기
10. 궁극의 의식상태
1. 나는 누구인가
2. 그것의 절반
3. 무경계 영토
4. 무경계 각성
5. 무경계 순간
6. 경계의 생성과 전개과정
7. 페르소나 수준 : 발견의 출발점
8. 켄타우로스 수준
9. 초월적 자기
10. 궁극의 의식상태
본문내용
에 물러나는 경향도 있다. 이 미세한 저항, 외면하고 물러나는 경향으로 인해 합일의식이 차단된다. 즉,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 '상실'된다. 이 합일의식의 '상실'은 우리를 경계의 세계, 공간과 시간, 고뇌와 죽음의 세계로 빠트린다.
하지만 이 경계와 투쟁의 세계를 통과해 갈 경우, 우리는 기본적으로 단지 한 가지 욕구, 즉 합일의식을 다시 회복하려는 욕구, 무경계 영토를 다시 한번 발견하려는 우리의 욕망에 의해 동기화된다. 우리의 모든 욕망·바램·의도·소망은 궁극적으로는 합일의식에 대한 '대리만족'이다. 근본적으로 원하는 유일한 것이 합일의식이라 할지라도, 그가 유일하게 하는 것은 그것에 저항하는 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왠지 모르게 이 현재는 충분히 올바른 것이 아니고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현재에 총체적으로 안주하는 대신, 새롭고 더 나은 현재라고 생각하는 것을 쫓아 현재로부터 물러나기 시작한다. 현재의 세계로부터 물러나려고 할 경우, 마치 자신이 그 세계에서 분리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한쪽에는 자기, 다른 쪽에는 세계라는 근원적 경계를 세우게 된다. '최초의 원인'이란
최초의 경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 물러남이라는 경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최초의 원인이란 바로 이 순간에서의 우리의 행위이다. 현재 경험이라는 단일한 세계에 저항하는 순간,
우리는 필연적으로 세계를 분할하게 된다. 스펙트럼의 전개가 시작됐고, 대립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면적인 현재로부터 끊임없이 물러나는 것에는 이런 물러남을 받아줄 미래가 존재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사실상 이 물러남이 시간을 창조해낸다. 무시간적인 현재경험에서 물러나기 때문에(또는 물러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경험 자체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는 환상을 만들어 내게 된다. 경험들이 하나씩 직선적으로 우리 곁을 스쳐가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현재로부터 도피하면서 그 경험들로 빠르게 달려가기 때문일 뿐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 아무런 미래도 갖지 못하는데 대한 두려움, 물러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영적 수행의 특수조건이 드러내고 그런 다음 좌절시키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총체적인 저항이다.
개인이 영적 수행의 특수조건을 받아들이게 되면, 자신이 언제나 전반적인 현재에서 물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는 외면하고 물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 받는다. 그러나 그는 어떤 점에선 진보하기도 한다. 자신의 근원적 저항을 간파하고 완화시키기 시작한다. 이때가 허니문 시기이다. 그는 비교적 행복해 한다. 궁극적으론 해방의 희망이 있다고 느낀다.
초개인적 주시자에 이를 수조차 있다. 자신의 적을 이해하게 되고, 무엇을 파괴해야 할지를 안다. 어떻게 하면 물러남을 중단시킬 수 있단 말인가? 물러나려고 시도하고 있음을 안다.
물러나려는 짓을 멈춰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멈추려는 행위 자체는 또 다른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 물러나지 않으려는 것도 멈춤이 일어날 미래의 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전히 또 하나의 움직임에 불과하다. 현재를 각성하기 위한 시도에는 이 각성이 일어날 미래의 현재가 필요해진다.
영원한 현재란 자신이 붙잡으려고 하기 이전의 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붙잡으려면 어떤 움직임이 필요하며, 붙잡지 않으려고 해도 움직임은 필요하다.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바로 그 자리에서 그것을 놓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서서히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이 실은 하나의 저항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무엇을 하든 그 모두가 물러남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러나지 않으려는 모든 솜씨 좋은 시도도 포함된다. 사실상 저항하지 않고는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모든 움직임은 정의상 그 자체가 저항이기 때문이다.
위에 있는 수준에서의 치료는 모두 미세한 저항을 강화시킴으로써 거친 저항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선 좀 더 미세한 저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저항을 스펙트럼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추적해왔지만, 이 지점에서 저항이 그를 꼼짝 못하게 포위한다.
그는 그 이유를 직관하기 시작한다. 분리된 자기감과 저항감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리된 자기라는 내적인 감각은 물러나고, 저항하고, 수축되고, 곁에 서 있고, 외면하고,
붙잡으려는 느낌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가 했던 모든 행동이 잘못이었던 것은 그것을 자신이 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기가 곧 저항이며, 따라서 저항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바로 이 시점에서 모든 것이 저절로 올바르게 된다.
자신의 모든 움직임이 물러나려는 하나의 저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진실로 이해하게 되면, 모든 저항의 음모는 진정된다. 자신의 모든 움직임 속에서 이 저항을 보게 되면, 자발적으로 모든 저항을 전적으로 명도(明渡, 넘겨줌)하게 된다. 이 저항의 명도 자체가 합일의식의 열림이며, 무경계 각성의 실현이다. 개인은 마치 오랜 꿈에서 깨어난 듯 그간 언제나 알고 있었던 사실, 즉 분리된 자기로서의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는 영적 수행의 특수조건이 그 사람에게 그의 모든 저항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가장 깊은 수준에서 그 모든 저항을 좌절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특수조건은 우리의 파도 옮겨타기를 드러내고, 그런 다음 결국에는 그것을 실행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명도는 일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간파할 때 자연스럽게 저절로 일어난다. 합일은 언제나 이미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실은 저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내면의' 분리된 자기라는 존재감조차 하나의 저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 자기의 느낌과 물러남의 느낌은 하나이자 동일한 느낌이다.
당신이 이런 저항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이 저항감이다. 지금 이외에 다른 시간이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결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최초의 물러남처럼 보였던 것은 실은 지금의 원초적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이 경계와 투쟁의 세계를 통과해 갈 경우, 우리는 기본적으로 단지 한 가지 욕구, 즉 합일의식을 다시 회복하려는 욕구, 무경계 영토를 다시 한번 발견하려는 우리의 욕망에 의해 동기화된다. 우리의 모든 욕망·바램·의도·소망은 궁극적으로는 합일의식에 대한 '대리만족'이다. 근본적으로 원하는 유일한 것이 합일의식이라 할지라도, 그가 유일하게 하는 것은 그것에 저항하는 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왠지 모르게 이 현재는 충분히 올바른 것이 아니고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현재에 총체적으로 안주하는 대신, 새롭고 더 나은 현재라고 생각하는 것을 쫓아 현재로부터 물러나기 시작한다. 현재의 세계로부터 물러나려고 할 경우, 마치 자신이 그 세계에서 분리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한쪽에는 자기, 다른 쪽에는 세계라는 근원적 경계를 세우게 된다. '최초의 원인'이란
최초의 경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 물러남이라는 경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최초의 원인이란 바로 이 순간에서의 우리의 행위이다. 현재 경험이라는 단일한 세계에 저항하는 순간,
우리는 필연적으로 세계를 분할하게 된다. 스펙트럼의 전개가 시작됐고, 대립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면적인 현재로부터 끊임없이 물러나는 것에는 이런 물러남을 받아줄 미래가 존재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사실상 이 물러남이 시간을 창조해낸다. 무시간적인 현재경험에서 물러나기 때문에(또는 물러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경험 자체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는 환상을 만들어 내게 된다. 경험들이 하나씩 직선적으로 우리 곁을 스쳐가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현재로부터 도피하면서 그 경험들로 빠르게 달려가기 때문일 뿐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 아무런 미래도 갖지 못하는데 대한 두려움, 물러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영적 수행의 특수조건이 드러내고 그런 다음 좌절시키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총체적인 저항이다.
개인이 영적 수행의 특수조건을 받아들이게 되면, 자신이 언제나 전반적인 현재에서 물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는 외면하고 물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 받는다. 그러나 그는 어떤 점에선 진보하기도 한다. 자신의 근원적 저항을 간파하고 완화시키기 시작한다. 이때가 허니문 시기이다. 그는 비교적 행복해 한다. 궁극적으론 해방의 희망이 있다고 느낀다.
초개인적 주시자에 이를 수조차 있다. 자신의 적을 이해하게 되고, 무엇을 파괴해야 할지를 안다. 어떻게 하면 물러남을 중단시킬 수 있단 말인가? 물러나려고 시도하고 있음을 안다.
물러나려는 짓을 멈춰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멈추려는 행위 자체는 또 다른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 물러나지 않으려는 것도 멈춤이 일어날 미래의 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전히 또 하나의 움직임에 불과하다. 현재를 각성하기 위한 시도에는 이 각성이 일어날 미래의 현재가 필요해진다.
영원한 현재란 자신이 붙잡으려고 하기 이전의 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붙잡으려면 어떤 움직임이 필요하며, 붙잡지 않으려고 해도 움직임은 필요하다.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바로 그 자리에서 그것을 놓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서서히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이 실은 하나의 저항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무엇을 하든 그 모두가 물러남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러나지 않으려는 모든 솜씨 좋은 시도도 포함된다. 사실상 저항하지 않고는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모든 움직임은 정의상 그 자체가 저항이기 때문이다.
위에 있는 수준에서의 치료는 모두 미세한 저항을 강화시킴으로써 거친 저항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선 좀 더 미세한 저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저항을 스펙트럼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추적해왔지만, 이 지점에서 저항이 그를 꼼짝 못하게 포위한다.
그는 그 이유를 직관하기 시작한다. 분리된 자기감과 저항감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리된 자기라는 내적인 감각은 물러나고, 저항하고, 수축되고, 곁에 서 있고, 외면하고,
붙잡으려는 느낌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가 했던 모든 행동이 잘못이었던 것은 그것을 자신이 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기가 곧 저항이며, 따라서 저항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바로 이 시점에서 모든 것이 저절로 올바르게 된다.
자신의 모든 움직임이 물러나려는 하나의 저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진실로 이해하게 되면, 모든 저항의 음모는 진정된다. 자신의 모든 움직임 속에서 이 저항을 보게 되면, 자발적으로 모든 저항을 전적으로 명도(明渡, 넘겨줌)하게 된다. 이 저항의 명도 자체가 합일의식의 열림이며, 무경계 각성의 실현이다. 개인은 마치 오랜 꿈에서 깨어난 듯 그간 언제나 알고 있었던 사실, 즉 분리된 자기로서의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는 영적 수행의 특수조건이 그 사람에게 그의 모든 저항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가장 깊은 수준에서 그 모든 저항을 좌절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특수조건은 우리의 파도 옮겨타기를 드러내고, 그런 다음 결국에는 그것을 실행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명도는 일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간파할 때 자연스럽게 저절로 일어난다. 합일은 언제나 이미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실은 저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내면의' 분리된 자기라는 존재감조차 하나의 저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 자기의 느낌과 물러남의 느낌은 하나이자 동일한 느낌이다.
당신이 이런 저항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이 저항감이다. 지금 이외에 다른 시간이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결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최초의 물러남처럼 보였던 것은 실은 지금의 원초적인 움직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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