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6·10만세시위 투쟁의 전개
3. 6·10만세시위 시대적 배경
4. 6·10만세시위투쟁의 한계와 역사적 의의
5. 6·10 만세 운동의 영향
6. 6·10만세시위 준비과정
7. 맺음말
참고문헌
2. 6·10만세시위 투쟁의 전개
3. 6·10만세시위 시대적 배경
4. 6·10만세시위투쟁의 한계와 역사적 의의
5. 6·10 만세 운동의 영향
6. 6·10만세시위 준비과정
7.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시위대를 숨겨 두고 격문과 선전삐라를 뿌려 계속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칠 것.
(2)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전선통일’ 시도와 반제민족통일전선의 모색
조선공산당 및 투쟁지도부는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중심적 과제였던 반제민족통일전선 결성 문제와 관련하여 6.10 만세투쟁 준비과정에서 구체적인 조직 형태를 만들려고 모색하였다. 그런데 조선공산당은 6.10 만세투쟁계획 이전부터 비타협 민족주의자와의 제휴를 모색해 오고는 있었다. 주로 당 간부회의 차원에서 국민당 형태의 통일전선체를 구상하여 민족사회 양 진영을 통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 당 책임비서 강달영은 1926년 3월 10일 권동진, 이종린, 신석우, 안재홍, 유억겸, 오상준, 박동완 등의 민족주의자들과 회합하여 제휴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개량주의자로 전락한 최린의 문제로 구체적인 합의를 보지 못했다. 어쨌든 조선공산당이 이루려고 노력했던 통일전선체의 구도는 6.10 만세투쟁에 와서 ‘대한독립당’이라는 구체적인 명칭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 및 투쟁지도부에서는 이의 실현을 위해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자 대부분은 3.1 운동 때의 무참한 학살을 연상하여 행동에 주저하였다. 결국 ‘대한독립당’ 형태의 통일전선 모색은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6.10 만세투쟁 준비과정에서 천도교와의 제휴는 이루어졌다. 조선공산당 및 투쟁지도부는 권동진, 박인호, 박래홍 등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구파와 상층교섭 형태로 제휴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6.10 만세 투쟁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데, 지도부가 사전 와해되어 실제 어느 정도의 결과를 가져왔을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천도교에서 동원할 수 있는 대중이 3만이었다는 점과 인쇄된 격문 및 전단 5만여 매를 임시로 천도교 교당 내에 은닉해 둘 수 있었고, 지방과의 조직연락망을 건설해 갈 때 천도교 교구의 역할도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 제휴가 실천적으로 나타났다는 의미에서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3) 지방조직망 건설과 학생조직화 사업
조선공산당 및 투쟁지도부가 통일적인 전국적 궐기를 계획했던 만큼 이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작업도 착수되었다. 이 역할의 책임자로 선임된 사람은 박래원과 민창식이다. 이들은 격문 인쇄 작업도 맡고 있었다. 이들로 하여금 지방과의 연락과 조직 사업을 맡게 했던 것은 격문 및 전달을 지방에 보내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박래원은 천도교 청년동맹 간부이기 때문에 각 지방에 있는 천도교 교구와 연락하기가 용이했을 것이다.
박래원은 대전을 중심으로 한 호남선, 경부선 방면을 맡았으며, 사리원, 평양을 중심으로 한 경의선 방면과 원산을 중심으로 한 경원선 방면은 민창식이 역할 분담했다. 주로 철도연변의 도시와 농촌을 중심으로 지방조직 건설이 이루어졌다.
이들의 정력적인 노력 결과 전국 58여개 도시와 연계망을 완성했다. 이러한 지방조직 건설사업은 주로 노동단체, 소작인조합, 천도교 교구, 청년단체, 신문사 지국, 개벽 지사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에 있던 당원, 고려공청회원들의 역할도 있었다. 그리고 앞서 인쇄한 유인물과 상해로부터 보내오기로 한 격문을 잡지, 화물, 각 신문지 등에 포장하여 6월 초에 각지로 발송할 수 있도록 빈틈없는 준비를 해 나갔다.
한편 조선공산당은 학생조직화 사업에 착수했다. 조선공산당은 통일전선체인 국민당 형태의 대한독립당 건설을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제의 식민지 압박을 가장 예민하게 느끼고 있던 학생층을 6.10 투쟁에서 조직적으로 동원하기로 했다.
6.10 투쟁지도부에서는 당원이면서 연희전문 문과 2년생인 이병립을 유인물 살포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물론 조직 동원 대상이 학생층이었기 때문에 주로 학생들을 상대로 한 유인물 배포작업이었다. 그에게는 또한 유인물 배포 책임과 함께 학생 조직화 사업도 주어졌다. 이는 그가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회 학생부 임시간부를 맡고 있었으며, 조선공산당 학생부 프렉션 조직원으로서 상설조직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이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공산당이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통해 6.10 만세투쟁을 준비해 가는 동안 이와는 별개로 학생들 자체적으로 준비해 가는 일시적 투쟁조직체(소위 ‘통동계’)가 있었다. 이들은 향우적, 교우적 기반에 의해 이루어진 소규모의 학생 집단이었다. 이들은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이 계획 단계부터 일정하게 연대를 이루며 만세시위를 추진했던 것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해 갔다. 이들의 운동은 3.1 운동 정신의 계승과 식민지 사회의 민족 모순을 자각하면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점에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인쇄한 격문을 추진했는데 동지를 포섭하는 과정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연대를 이루게 되었고, 인산 당일에 연합 만세시위를 벌일 수 있었다.
7. 맺음말
610만세운동이라 하면 고등학교 때 한국근현대사 시간에 프린트로 배운 게 다였는데, 이렇게 노트정리도 하고 논문도 읽어보아서 뜻 깊었다. 사실, 만세운동이라고만 알았지 주요인물이라던가 시대적 배경은 잘 알지 못했는데, 31운동과 비교까지 하면서 그 특성이 무엇이었는지 등에 대해 알게 되어 뿌듯했다. 이제껏 들었던 수업방식과는 달리 발표수업도 남다르고, 시간도 제일 많이 걸렸던 과제지만, 그만큼 배운 것도 많았기에 기분이 좋다. 직접 도서관에가서 책도 찾아보고, 논문도 일일이 읽고...... 자료가 워낙 없어서 자료 찾기가 가장 힘들고 차료찾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 민족운동사」, 1990년.
윤석수, 역사 문제 연구소,「역사비평」,1989년.
윤석수 ,『 조선공산당과 6.10항일시위운동, 역사비평 봄호』, 1989년.
장석흥,「내일을 여는역사」,2003년.
장석흥, 한국근현대사학회,『 권오설의 민족운동 노선과 성격』2001년.
장석흥,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9호』년.
이준식, 『다시 기억하는 혁명가 김단야의 삶 ,내일을 여는 역사 제22호』, 2005년.
임경석, 『잊을 수 없는 사람들-강달영,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역사비평, 2002 봄호.
(2)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전선통일’ 시도와 반제민족통일전선의 모색
조선공산당 및 투쟁지도부는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중심적 과제였던 반제민족통일전선 결성 문제와 관련하여 6.10 만세투쟁 준비과정에서 구체적인 조직 형태를 만들려고 모색하였다. 그런데 조선공산당은 6.10 만세투쟁계획 이전부터 비타협 민족주의자와의 제휴를 모색해 오고는 있었다. 주로 당 간부회의 차원에서 국민당 형태의 통일전선체를 구상하여 민족사회 양 진영을 통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 당 책임비서 강달영은 1926년 3월 10일 권동진, 이종린, 신석우, 안재홍, 유억겸, 오상준, 박동완 등의 민족주의자들과 회합하여 제휴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개량주의자로 전락한 최린의 문제로 구체적인 합의를 보지 못했다. 어쨌든 조선공산당이 이루려고 노력했던 통일전선체의 구도는 6.10 만세투쟁에 와서 ‘대한독립당’이라는 구체적인 명칭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 및 투쟁지도부에서는 이의 실현을 위해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자 대부분은 3.1 운동 때의 무참한 학살을 연상하여 행동에 주저하였다. 결국 ‘대한독립당’ 형태의 통일전선 모색은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6.10 만세투쟁 준비과정에서 천도교와의 제휴는 이루어졌다. 조선공산당 및 투쟁지도부는 권동진, 박인호, 박래홍 등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구파와 상층교섭 형태로 제휴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6.10 만세 투쟁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데, 지도부가 사전 와해되어 실제 어느 정도의 결과를 가져왔을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천도교에서 동원할 수 있는 대중이 3만이었다는 점과 인쇄된 격문 및 전단 5만여 매를 임시로 천도교 교당 내에 은닉해 둘 수 있었고, 지방과의 조직연락망을 건설해 갈 때 천도교 교구의 역할도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 제휴가 실천적으로 나타났다는 의미에서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3) 지방조직망 건설과 학생조직화 사업
조선공산당 및 투쟁지도부가 통일적인 전국적 궐기를 계획했던 만큼 이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작업도 착수되었다. 이 역할의 책임자로 선임된 사람은 박래원과 민창식이다. 이들은 격문 인쇄 작업도 맡고 있었다. 이들로 하여금 지방과의 연락과 조직 사업을 맡게 했던 것은 격문 및 전달을 지방에 보내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박래원은 천도교 청년동맹 간부이기 때문에 각 지방에 있는 천도교 교구와 연락하기가 용이했을 것이다.
박래원은 대전을 중심으로 한 호남선, 경부선 방면을 맡았으며, 사리원, 평양을 중심으로 한 경의선 방면과 원산을 중심으로 한 경원선 방면은 민창식이 역할 분담했다. 주로 철도연변의 도시와 농촌을 중심으로 지방조직 건설이 이루어졌다.
이들의 정력적인 노력 결과 전국 58여개 도시와 연계망을 완성했다. 이러한 지방조직 건설사업은 주로 노동단체, 소작인조합, 천도교 교구, 청년단체, 신문사 지국, 개벽 지사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에 있던 당원, 고려공청회원들의 역할도 있었다. 그리고 앞서 인쇄한 유인물과 상해로부터 보내오기로 한 격문을 잡지, 화물, 각 신문지 등에 포장하여 6월 초에 각지로 발송할 수 있도록 빈틈없는 준비를 해 나갔다.
한편 조선공산당은 학생조직화 사업에 착수했다. 조선공산당은 통일전선체인 국민당 형태의 대한독립당 건설을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제의 식민지 압박을 가장 예민하게 느끼고 있던 학생층을 6.10 투쟁에서 조직적으로 동원하기로 했다.
6.10 투쟁지도부에서는 당원이면서 연희전문 문과 2년생인 이병립을 유인물 살포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물론 조직 동원 대상이 학생층이었기 때문에 주로 학생들을 상대로 한 유인물 배포작업이었다. 그에게는 또한 유인물 배포 책임과 함께 학생 조직화 사업도 주어졌다. 이는 그가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회 학생부 임시간부를 맡고 있었으며, 조선공산당 학생부 프렉션 조직원으로서 상설조직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이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공산당이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통해 6.10 만세투쟁을 준비해 가는 동안 이와는 별개로 학생들 자체적으로 준비해 가는 일시적 투쟁조직체(소위 ‘통동계’)가 있었다. 이들은 향우적, 교우적 기반에 의해 이루어진 소규모의 학생 집단이었다. 이들은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이 계획 단계부터 일정하게 연대를 이루며 만세시위를 추진했던 것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해 갔다. 이들의 운동은 3.1 운동 정신의 계승과 식민지 사회의 민족 모순을 자각하면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점에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인쇄한 격문을 추진했는데 동지를 포섭하는 과정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연대를 이루게 되었고, 인산 당일에 연합 만세시위를 벌일 수 있었다.
7. 맺음말
610만세운동이라 하면 고등학교 때 한국근현대사 시간에 프린트로 배운 게 다였는데, 이렇게 노트정리도 하고 논문도 읽어보아서 뜻 깊었다. 사실, 만세운동이라고만 알았지 주요인물이라던가 시대적 배경은 잘 알지 못했는데, 31운동과 비교까지 하면서 그 특성이 무엇이었는지 등에 대해 알게 되어 뿌듯했다. 이제껏 들었던 수업방식과는 달리 발표수업도 남다르고, 시간도 제일 많이 걸렸던 과제지만, 그만큼 배운 것도 많았기에 기분이 좋다. 직접 도서관에가서 책도 찾아보고, 논문도 일일이 읽고...... 자료가 워낙 없어서 자료 찾기가 가장 힘들고 차료찾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 민족운동사」, 1990년.
윤석수, 역사 문제 연구소,「역사비평」,1989년.
윤석수 ,『 조선공산당과 6.10항일시위운동, 역사비평 봄호』, 1989년.
장석흥,「내일을 여는역사」,2003년.
장석흥, 한국근현대사학회,『 권오설의 민족운동 노선과 성격』2001년.
장석흥,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9호』년.
이준식, 『다시 기억하는 혁명가 김단야의 삶 ,내일을 여는 역사 제22호』, 2005년.
임경석, 『잊을 수 없는 사람들-강달영,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역사비평, 2002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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