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공녀
1. 머리말
2. 공녀제도
1) 고려(高麗)와 원(元)
2) 조선(朝鮮)과 명(明)
3) 조선(朝鮮)과 청(淸)
3. 공녀 기피
4. 공녀에서 황후로 (기황후)
5. 그 밖에 황제로부터 사랑을 받은 공녀들
6. 맺음말
Ⅱ. 환향녀
1. 머릿말
2. 환향녀의 기원
3. 환향녀의 예
참고문헌
1. 머리말
2. 공녀제도
1) 고려(高麗)와 원(元)
2) 조선(朝鮮)과 명(明)
3) 조선(朝鮮)과 청(淸)
3. 공녀 기피
4. 공녀에서 황후로 (기황후)
5. 그 밖에 황제로부터 사랑을 받은 공녀들
6. 맺음말
Ⅱ. 환향녀
1. 머릿말
2. 환향녀의 기원
3. 환향녀의 예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 거기서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 다 알 수는 없다. 기록에 있는 것처럼 억울하게 죽은 여인들도 있을 것이고, 소박맞지 않고 부인으로 잘 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2세들은 또 그 중국 땅에 살았을 것이고, 기황후의 자식과 같이 황제에 올랐던 이가 있는가 하면 각자 자신의 길을 갔을 것이다. 이러는 동안 한반도의 문물 또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고려만두, 고려병이 한 예이다. 이런 것은 나라에 힘이 없어 눈물로 보내야했던 공녀들의 흔적이다. 나라보다 더 힘이 없던 그녀들의 작은 힘의 소산인 것이다.
Ⅱ. 환향녀
1. 머릿말
조선조의 여성들에게 강요된 정절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 수 많은 아픔을 남겼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 행실이 단정치 못한 여자에게 쓰이는 “화냥년”이라는 말의 어원이된 조선조의 “환향녀”라는 말에서 이를 찾아 볼 수 있다.
2. 환향녀의 기원
환향녀는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과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많이 발생했는데. 주로 북쪽 지방에 사는 여인들의 피해가 컸다. 특히 의주에서 평양까지는 미인이 많아 벼슬아치나 양반의 처까지도 끌려갔다고 한다. 청나라에 끌려간 여자들 중 대부분 돌아올 수 없었으나, 많은 돈을 주고 돌아온 여자들도 ‘환향녀’로 불리면서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3. 환향녀의 예
※ 최명길이 청과의 교섭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2만5천명이 귀환하였다. 문제는 이들을 고국에서 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몸을 버린 화냥년들이라 해서 일들에게 자결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죄없는 그들은 목을 메거나 강물에 몸을 던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최명길의 주청으로 국왕이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렸다. “도상과 경기도 일원은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경상도는 낙동강, 충청도는 금강, 전라도는 영산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을 각각 회절강으로 삼을 것이다. 환향녀들은 회절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국법으로다스릴 것이다.“
위와 같이 병자호란 후 돌아온 여자들도 고향에서 환영 받지 못하고 오히려 마을의 수치, 정절을 잃어버린 여자로써 탄압을 받았으며 또한, 시댁과 남편들로 부터 이혼을 요구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하며 그것이 정치의 쟁점이 되기도 했다.(그 예로써 당시 강화도에서 청군에 붙잡혀 끌려간 영의정 장유의 며느리는 실절했다는 이유로 시부모로부터 이혼요구를 당했으며 시부모는 인조의 허락을 받지 못해 그녀를 내쫓지 못하였으나 영의정 장유가 죽은 후 그의 아내 김씨는 환양녀라는 이유로 며느리를 내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시부모에게 불손하다는 이유로 허락을 받아 이혼시켰다. 이처럼 암울한 역사의 산물인 환향녀는 조선조의 신분사회에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위와 같이 자살을 강요당한 경우 또한 적지 않았으며 심지어 살해당하는 경우 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돌아온 여인들의 삶이 절개를 잃은 부도덕한 여인으로 낙인 찍혀 그들의 인생이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 준다. 또한 당시 적국에 포로로 잡혀간 사대부 집안 여인들의 실종에 대해 정조를 지키려 자결한 것처럼 위장, 나라로부터는 열녀문을 하사받았던 역사적 사건또한 존재한다. 이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가문의 체통과 사대부 집안의 허위의식들이 만들어낸 열녀문 뒤에 가려진 조선조의 정절이데올로기에 의해 희생된 여성들의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김남 저, 조선왕조 실록, 어젠다 2012
민병덕 저, LTE 한국사, 책이있는마을 2014
양재홍 글, 한국사 사전, 지경사 2011
이배용 저, 우리 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1999
Ⅱ. 환향녀
1. 머릿말
조선조의 여성들에게 강요된 정절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 수 많은 아픔을 남겼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 행실이 단정치 못한 여자에게 쓰이는 “화냥년”이라는 말의 어원이된 조선조의 “환향녀”라는 말에서 이를 찾아 볼 수 있다.
2. 환향녀의 기원
환향녀는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과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많이 발생했는데. 주로 북쪽 지방에 사는 여인들의 피해가 컸다. 특히 의주에서 평양까지는 미인이 많아 벼슬아치나 양반의 처까지도 끌려갔다고 한다. 청나라에 끌려간 여자들 중 대부분 돌아올 수 없었으나, 많은 돈을 주고 돌아온 여자들도 ‘환향녀’로 불리면서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3. 환향녀의 예
※ 최명길이 청과의 교섭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2만5천명이 귀환하였다. 문제는 이들을 고국에서 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몸을 버린 화냥년들이라 해서 일들에게 자결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죄없는 그들은 목을 메거나 강물에 몸을 던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최명길의 주청으로 국왕이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렸다. “도상과 경기도 일원은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경상도는 낙동강, 충청도는 금강, 전라도는 영산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을 각각 회절강으로 삼을 것이다. 환향녀들은 회절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국법으로다스릴 것이다.“
위와 같이 병자호란 후 돌아온 여자들도 고향에서 환영 받지 못하고 오히려 마을의 수치, 정절을 잃어버린 여자로써 탄압을 받았으며 또한, 시댁과 남편들로 부터 이혼을 요구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하며 그것이 정치의 쟁점이 되기도 했다.(그 예로써 당시 강화도에서 청군에 붙잡혀 끌려간 영의정 장유의 며느리는 실절했다는 이유로 시부모로부터 이혼요구를 당했으며 시부모는 인조의 허락을 받지 못해 그녀를 내쫓지 못하였으나 영의정 장유가 죽은 후 그의 아내 김씨는 환양녀라는 이유로 며느리를 내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시부모에게 불손하다는 이유로 허락을 받아 이혼시켰다. 이처럼 암울한 역사의 산물인 환향녀는 조선조의 신분사회에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위와 같이 자살을 강요당한 경우 또한 적지 않았으며 심지어 살해당하는 경우 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돌아온 여인들의 삶이 절개를 잃은 부도덕한 여인으로 낙인 찍혀 그들의 인생이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 준다. 또한 당시 적국에 포로로 잡혀간 사대부 집안 여인들의 실종에 대해 정조를 지키려 자결한 것처럼 위장, 나라로부터는 열녀문을 하사받았던 역사적 사건또한 존재한다. 이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가문의 체통과 사대부 집안의 허위의식들이 만들어낸 열녀문 뒤에 가려진 조선조의 정절이데올로기에 의해 희생된 여성들의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김남 저, 조선왕조 실록, 어젠다 2012
민병덕 저, LTE 한국사, 책이있는마을 2014
양재홍 글, 한국사 사전, 지경사 2011
이배용 저, 우리 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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