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세력의 사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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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지방 세력의 사례연구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머리말

Ⅰ. 패서지역의 지방세력
 1. 패강진의 설치
 2. 지방세력의 성장과 활동 양상

Ⅱ. 청주지역의 지방세력
 1. 신라 말 청주 지방세력
 2. 고려건국 전후의 청주 지방세력의 동향
 3. 고려시대 청주 지방세력의 재편성

Ⅲ. 나주지역의 지방세력
 1. 신라 말 나주지방세력
 2. 왕건과 나주지방세력
 3. 고려 건국 후 나주지방세력

Ⅳ. 진주지역의 지방세력
 1. 진주지방의 중요성과 필요성
 2. 진주임씨의 세력형성

Ⅴ. 울산지역의 지방세력
 1. 朴允雄의 성장기반
 2. 朴允雄의 歸附와 그에 따른 반대급부

맺음말

본문내용

업장을 경영, 지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두 번째로 경제적 기반은 울산항의 무역 이윤을 장악함으로써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울산은 경주의 외항으로써 국내외 무역의 중심지로써, 이 곳을 장악한 박윤웅에게 축적되는 경제적 이윤은 상당한 것이었다. 박윤웅의 세력근거지를 울산항 중심부인 新鶴城과 伴鷗城으로 잡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고, 신학성이 달천광산과 인근지역이라는 점도 박윤웅의 성장기반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박윤웅을 해상세력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2. 朴允雄의 歸附와 그에 따른 반대급부
후삼국시기에 이르러 후백제와 고려라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게 되어, 지방의 지방세력들은 그들 스스로 독자적인 세력 유지에 어려움을 느낀다. 소위 ‘豪族長’들은 자신의 영향권 하에 있던 지방세력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에 후백제나 고려에게 귀부하지 않으면 그들의 세력을 유지시켜 나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귀부라는 절차를 통해 소위 ‘豪族長’들은 새로운 권력과 연결되게 되었다. 구산우, 1992「나말여초의 울산지역과 박윤응」『한국문화연구』5
이에 박윤응도 왕건에게 귀부하게 된다. 박윤응의 귀부 후 이 지역을 고려의 행정구역으로 편제할 때에 고려는 흥례부(하곡ㆍ동진ㆍ우풍현)의 명칭과 구성을 그대로 온존시켰다. 이에 더하여 박윤응을 三韓功臣으로 책봉하게 된다. 歸附한 이들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들이 지베하던 세력권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방제도로서 州附를 설치하고, 功臣에 책봉하거나 元尹 이상의 官階 수여와 함께 祿邑을 지급하였다. - 구산우, 1992「나말여초의 울산지역과 박윤응」『한국문화연구』5
살피건대 本府에 農所가 있는데 柳浦의 서쪽, 府城의 동쪽에 있다. 대대로 전하기를 東津(顯)은 興麗公의 采地였기 때문에 農所라고 칭한다고 한다. 살피건데 柳浦의 藿巖은 미역을 따는 바위이다...興麗公이 공을 세워 특별히 열두 바위를 采地로 사여받았다. (『蔚山朴氏族譜』1924년 간행)
歸附의 경제적 반대급부는 膿巢의 ‘采地’와 柳浦의 ‘藿巖’을 받았다. 이 지역은 그의 세력근거지인 신학성과도 가까운 곳이다. 박윤웅의 경우는 녹읍의 일반적인 유형인 토지와 함께, 해안지방의 특수성이 반영된 형태의 양식장인 ‘곽암’ 12개를 하사받았다. 이러한 해안지방의 해산물 양식장에 대한 지배권을 祿邑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 그 당시 생활상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적절함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식생활이 해산물 의존도가 매우 높고, 질 좋은 해산물은 지배층과 국가의 수취대상이 되었다.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나말여초 시기의 유력한 지방세력인 패서지역, 청주지역, 나주지역, 진주지역, 울산지역 등의 사례연구를 통하여 그들의 존재양태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패강진은 패서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군사적 성격을 띠면서 행정적 구역을 갖는 특이한 면모를 보여준다. 북변수비의 요충지로서 군사적 기능이 중심이 되었고 또한 지방세력 역시 이러한 품 안에서 성장해왔음을 논해보았다. 이들의 성장은 단순히 여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후에 왕조를 바꾸는 정도까지 어떠한 형태의 힘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행사할 정도로 그 세력은 막강하였다.
청주의 지방세력은 처음 궁예정권하에서는 궁예의 지지기반이었지만 왕건의 등장으로 친궁예세력과 친왕건세력으로 분열하게 된다. 왕건은 궁예정권을 무너뜨리고 고려를 세운다. 그러나 왕건 즉위에 불만을 품은 친궁예세력들은 반란을 일으키지만 모두 진압된다. 이후 분열되어있던 청주지방세력들은 차츰 고려정부에 흡수되어 더 이상 고려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볼 수 없게 된다.
나주의 지방세력은 독립적인 지배체제를 지니다가 견훤과 왕건의 여러 차례에 걸친 쟁탈전 끝에 왕건 즉, 태봉의 영역에 편입된다. 나주지방은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왕건의 고려 건국 후 그 지위가 상승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나주를 비롯한 서남해안일대가 견훤의 세력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 지위는 현격히 저하되고 패서지역의 지방세력이 득세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정계에서의 정치적 입지는 약화되게 된다.
왕건이 궁예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자, 궁예의 절대적 지지자이자 궁예세력의 핵심인물들인 청주지방의 지방세력들은 상당한 반발을 하게 된다. 이에 청주와 북쪽으로 밀접한 지역이며, 자신과 연관이 있는 진주의 지방세력들로 하여금 청주지역의 지방세력을 견제하였다. 진주를 군사적 주둔지로 진주세력을 활용한 것이다. 또한 통혼관계를 통하여 그 둘 사이의 연계를 계속했으며, 자신의 측근세력의 포진을 위해 인사발령에도 진주 지방세력을 이용한 것이다.
울산지역은 신라시대 경주의 외항으로 문화와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울산지역 지방세력들의 수장으로 박윤응이 등장하게 되는데, 박윤응은 경제적으로는 달천광산을 장악함으로 그 군사적 기반으로 삼고 울산항을 장악함으로써 그 무역이윤으로 경제적 기반을 삼는다. 박윤응은 후에 왕건에게 귀부하고 그 반대급부로 삼한공신에 책봉되고, 해안지역의 특성답게 녹읍으로 ‘곽암’(미역을 수확하는 바위) 12개의 소유권을 갖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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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제, 1996「고려 태조대 패서인의 동향」『고려 태조의 국가경영』
구산우, 1992「나말여초의 울산지역과 박윤응」『한국문화연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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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 1999「궁예와 왕건과 청주호족」『중원문화연구』2, 3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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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진, 1987「고려건국기의 나주세력」『성대사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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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동, 2001「나말여초 면천과 복지겸」『한국중세사회의 제문제』
신호철, 1992「신라말 고려초 매곡성장군 공직 - 지방호족 존재양태의 일단」『호서문화연구』10
정청주, 1988「신라말 고려초 호족의 형성과 변화에 대한 일고찰 - 평산박씨 가문의 실례분석」『역사학보』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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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8.24
  • 저작시기2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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