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민속극의 특성
Ⅱ. 민속극의 형식
1. 형식
2. 작품
Ⅲ. 민속극의 연행자와 관객 및 악사
Ⅳ. 민속극의 교육화
Ⅴ. 민속극과 가면극
Ⅵ. 민속극과 민속학자
참고문헌
Ⅱ. 민속극의 형식
1. 형식
2. 작품
Ⅲ. 민속극의 연행자와 관객 및 악사
Ⅳ. 민속극의 교육화
Ⅴ. 민속극과 가면극
Ⅵ. 민속극과 민속학자
참고문헌
본문내용
친구를 좋아하고 우정과 의리에 두터운 성격이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탁월한 친화력을 바탕으로 민속의 현장에서 제보자에게 접근하고, 학계의 연구자들을 규합하고, 일본인만이 아니라 서양인까지도 자신의 활동과 사업에 끌어들였던 것 같다.
둘째, 상고를 졸업하고 상과대학에 진학하여 상학을 전공하였지만, 閑良氣質과 낭만적인 성품은 실리적이고 타산적인 분야를 포기하고 자유분방한 민속학자의 길을 택하게 만든 것 같다.
셋째, 관동대지진으로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한 이래 민속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조사를 시작했는데, “부유한 편이었으나 가정생활은 그다지 평온하지는 않았다. 그는 망국의 비운에 울분한 심경과 우울한 가정생활의 고적한 감회를 애족우국의 정열로써 이 나라 민속의 연구에로 집주하였다”는 말대로라면, 드높은 민족의식과 불우한 가정생활이 맞물리면서 사라져가는 민속문화의 전승 현장을 찾아 여행함으로써 민족적인 울분과 개인적인 번뇌를 해소시켰던 것 같다.
넷째, “그는 그때로서는 최고급의 독일제 사진기를 가지고 私財를 써가면서 우리나라 각 지방을 답사하여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각종의 민속놀이며, 연중행사며, 관행이며, 종교의식이며, 慶宴方式이며, 기물, 도구며 등등 각종의 민속학 자료를 촬영하고 채취하고 수집하였다” 는 증언과 ‘조선민속학회’의 학회지인 조선민속12권을 자비로 간행한 사실로 보건대, 그의 민속학 연구도 집안이 부유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재정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측면이 없지 않다.
다섯째, 민속자료를 찾아 전국을 누빈 나머지 10,000여 점의 사진자료를 남길 수 있었고(대부분이 625전쟁 때 분실, 파손되고, 현재는 2,000여 점만이 유족들에 의해 보관되고 있음), 탈을 비롯한 민속자료의 수집에만 그치지 않고, 古本 삼국유사의 殘本과 梅月堂詩藁의 필사본 같은 진귀한 고서적의 수집까지 손댔는데, 그의 이처럼 남다른 탐구욕과 수집벽은 민속학자가 필수적으로 지녀야 할 자질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여섯째, 1922년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던 중 일본 민속학의 창시자인 야니기다 구니오(柳田國男, 1875~1962)가 1913년 향토문화을 창간하여 일본 전통문화의 연구를 통해 일본 고유의 것을 발견하려던 일본 민속학계의 동향을 접촉하고, 그로부터 자극 받았을 개연성도 상정해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송석하를 민속학자로 만든 배경과 동기 및 요인을 추정해 보았는데, 대체로 활달한 武人氣質, 낭만적인 한량기질, 민족의식, 풍부한 재산, 왕성한 탐구욕과 수집벽 등으로 집약된다.
참고문헌
◎ 김익두, 민속극/전통극 연구의 현황과 과제, 지역민속학회, 2009
◎ 박진태 외 1명, 민속극의 예술성 : 탈놀이의 종합예술성과 풍자미, 비교민속학회, 2002
◎ 박진태, 민속극교육론, 한국구비문학회, 1998
◎ 이광진, 한국 전통민속극의 관광축제화 방안연구, 한국관광연구학회, 2003
◎ 장한기, 한국 민속극의 공간성 연구, 동국대학교, 1982
◎ 허용호, 무형문화유산으로서 민속극의 보존과 전승, 비교민속학회, 2009
둘째, 상고를 졸업하고 상과대학에 진학하여 상학을 전공하였지만, 閑良氣質과 낭만적인 성품은 실리적이고 타산적인 분야를 포기하고 자유분방한 민속학자의 길을 택하게 만든 것 같다.
셋째, 관동대지진으로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한 이래 민속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조사를 시작했는데, “부유한 편이었으나 가정생활은 그다지 평온하지는 않았다. 그는 망국의 비운에 울분한 심경과 우울한 가정생활의 고적한 감회를 애족우국의 정열로써 이 나라 민속의 연구에로 집주하였다”는 말대로라면, 드높은 민족의식과 불우한 가정생활이 맞물리면서 사라져가는 민속문화의 전승 현장을 찾아 여행함으로써 민족적인 울분과 개인적인 번뇌를 해소시켰던 것 같다.
넷째, “그는 그때로서는 최고급의 독일제 사진기를 가지고 私財를 써가면서 우리나라 각 지방을 답사하여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각종의 민속놀이며, 연중행사며, 관행이며, 종교의식이며, 慶宴方式이며, 기물, 도구며 등등 각종의 민속학 자료를 촬영하고 채취하고 수집하였다” 는 증언과 ‘조선민속학회’의 학회지인 조선민속12권을 자비로 간행한 사실로 보건대, 그의 민속학 연구도 집안이 부유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재정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측면이 없지 않다.
다섯째, 민속자료를 찾아 전국을 누빈 나머지 10,000여 점의 사진자료를 남길 수 있었고(대부분이 625전쟁 때 분실, 파손되고, 현재는 2,000여 점만이 유족들에 의해 보관되고 있음), 탈을 비롯한 민속자료의 수집에만 그치지 않고, 古本 삼국유사의 殘本과 梅月堂詩藁의 필사본 같은 진귀한 고서적의 수집까지 손댔는데, 그의 이처럼 남다른 탐구욕과 수집벽은 민속학자가 필수적으로 지녀야 할 자질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여섯째, 1922년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던 중 일본 민속학의 창시자인 야니기다 구니오(柳田國男, 1875~1962)가 1913년 향토문화을 창간하여 일본 전통문화의 연구를 통해 일본 고유의 것을 발견하려던 일본 민속학계의 동향을 접촉하고, 그로부터 자극 받았을 개연성도 상정해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송석하를 민속학자로 만든 배경과 동기 및 요인을 추정해 보았는데, 대체로 활달한 武人氣質, 낭만적인 한량기질, 민족의식, 풍부한 재산, 왕성한 탐구욕과 수집벽 등으로 집약된다.
참고문헌
◎ 김익두, 민속극/전통극 연구의 현황과 과제, 지역민속학회, 2009
◎ 박진태 외 1명, 민속극의 예술성 : 탈놀이의 종합예술성과 풍자미, 비교민속학회, 2002
◎ 박진태, 민속극교육론, 한국구비문학회, 1998
◎ 이광진, 한국 전통민속극의 관광축제화 방안연구, 한국관광연구학회, 2003
◎ 장한기, 한국 민속극의 공간성 연구, 동국대학교, 1982
◎ 허용호, 무형문화유산으로서 민속극의 보존과 전승, 비교민속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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