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대 대통령 개관 - 초기 대통령, 의회 주도시대(1804~1933년), 현대적 대통령의 등장, 대통령 리더십의 상징, 영웅적 대통령, 황제적 대통령, 황제적 대통령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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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대 대통령 개관 - 초기 대통령, 의회 주도시대(1804~1933년), 현대적 대통령의 등장, 대통령 리더십의 상징, 영웅적 대통령, 황제적 대통령, 황제적 대통령 이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미국 역대 대통령 개관

I. 초기 대통령

II. 의회 주도시대(1804~1933년)

III. 현대적 대통령의 등장

IV. 대통령 리더십의 상징

V. 영웅적 대통령

VI. 황제적 대통령

VII. 황제적 대통령 이후

본문내용

서의 지위는 외적의 침략이나
미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해야 할 때만 인정되는 것이지 선전포
고도 하지 않은 전쟁까지 일방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통령의 기밀사항과 관련하여 헌법학자들이나 대법원, 의회도 일본 본토
에의 원자폭탄 투하 같은 중요한 외교 군사기밀을 대통령이나 그의 측근 보좌관들
이 독점하는 것은 모두 인정하였지만 닉슨 대통령과 같이 군사지원이나 캄보디아
원조 5개년계획 같은 것까지 기밀사항으로 독점하는 것은 강력 반대하였다.
슐레진저는 권력의 남용(abuse)과 권한횡령을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Schlesinger, 1973). 그의 관점에 의하면 링컨, 프랭클린 루스벨트, 트루먼 대통령
은 전시체제하에서 일시적으로 권한을 침해하였지만 평화시에까지 그 권한을 계속
행사할 의도는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존은, 닉슨 대통령은 심지어
평화시에까지 권력을 남용했고 절대적 권력을 대통령에게 본래적으로 부여된 특권
으로 보았다. ii) 황제적 대통령은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까지 계속 팽창일로를 걷
다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치유불능의 치명상을 받았음은 물론 닉슨 대통령의 사
임으로 남북전쟁 이래 최대의 헌정위기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7) 황제적 대통령 이후
닉슨 대통령의 사임 이후 임명된 대통령인 포드는 취임하자마자 의회와의 관체개
선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의회에서 행한 첫 연설에서 그는 의회와는 대결이 아닌
대화와 조정, 타협과 협조를 이룩하겠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대통령과 의회의 밀
월관계는 포드 대통령의 닉슨 사면을 계기로 불과 30일 만에 끝났다. 의회는 잃어
버린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1974년 의회예산처(Congressional Budget Office, CBO)
를 의회내에 설치하는 외에 유능한 전문가들을 많이 채용해 의회가 정책결정이나
행정부 지도감독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을 갖추었다.
의회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대통령이 밀리게 된 것은 포드 대통령이 선거에 의하지
않고 임명되었다는 사실도 작용하였다.
68년과 12년 사이 기년간은 분할정부(divided government)의 시대로 특징지어
진다. 분할정부란 대통령이 소속한 정당과 상 하원의 다수당이 서로 다른 경우를
말한다. 카터 행정부를 제의하곤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양원 모두 또는 어느 한 곳
을 민주당이 지배하는 의회를 상대하였다. 분할정부의 특징은 대통령이 거부권을
남발한다는 것이다. 포드 대통령은 30개월간의 재임기간중 66건의 거부권을 행사하
였고 그중 12건이 의회에 의해 재가결되었다.
11년 레이건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하였을 때는 전례에 비추어 단임으로 끝날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최고 집
행권자로서의 권능을 재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그레나다
침공, 리비아의 카다피 본부 폭격 등 일련의 군사작전 성공을 통해 대통령의 위상
을 확고히 하였다.
1984년 재선될 때쯤에는 대부분의 반대론자들도 레이건 대통령이 대통령의 위상
을 정부의 중심적 위치로 되돌려 놓는 데 성공하였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한 저명
한 칼럼니스트는 "그가 대통령직을 구제하였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라고 쓰고 있다(Broder, 1985). 레이건 대통령의 지도력은 집권 2기때 이란 콘트라
스캔들로 인해 손상을 입었으나 구소련의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대통령과
의 중거리 핵무기협정 조인으로 노련한 통치력이 재확인되었다. 그의 임기 마지막
해의 국민지지도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다음으로 높았다.
부시 대통령의 재임 4년간은 흔히 '레이건의 집권 제3기'로 불린다. 왜냐하면 부
시 대통령의 국내정책은 '레이거노믹스' (Reaganomics)로 설명되는 연방정부의 최소
한의 간섭정책을 답습하였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외교군사 부문에서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걸프전의 승리 직후 갤럽의 여론조사 결과는 89%의 지지도를 보
여 여론조사 역사상 최고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어했든 그의 재임중 구소련이 붕괴
되는 등 외교분야에서 괄목할 업적을 쌓았으나 경기침체가 워낙 큰 부담으로 작용
하여 1992년 선거에서 패배하였다.
민주당의 클린턴 후보는 국내경제를 원상으로 되돌려 놓겠다고 국민들에게 호소
하였고 국민들은 46세의 아칸소 주지사를 대통령으로 선택하였다. 군복무 경험도
없으며 월남전 당시 병역의무를 기피하였다고 비난받았던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분명 새로운 세대가 국가지도자로 등장하는 신호탄이었다. 미국에서 대통령이
되고 싶으면 가장 먼저 군복무를 마쳐야 하고, 이혼하거나 여자문제가 복잡해서도
안 되며, 마약에 손대면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불
구하고 클린턴 당시 후보는 선거기간중 이 세 가지 문제 모두에 연루되어 있었으나
거뜬히 당선되었다.
1996년 선거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민주당 대통령으로서는 최초
로 재선되는 진기록을 낳기도 하였다. 12년 만에 등장한 민주당의 클린턴 정부는
침체된 국내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3년에 시행했던 정책을 모
방하여 1백일 입법계획 등을 추진하였으나 의회의 반응은 별로 신통치 않았고 루스
벨트 정책의 아류로 평가절하되었다. 대통령은 자기가 소속된 정당이 의회 다수당
으로 있을 때 일하기가 더욱 수월한 것은 사실이지만 클린턴 대통령이 민주당이 다
수당이었던 집권 제1기 전반 2년 동안에도 의회와의 관계에서 고전했던 것은 정당
의 응집력 저하, 상 하원의 권력 분권화, 이익집단의 강세 때문이었다. 여하튼 클
린턴 대통령하의 지금의 미국은 최저실업률(4.6% 정도)과 물가안정 (2%이내)으로
대표되는 좋은 경제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의 대통령들이 국민의 기대와 국가현안 해결 능력 간의 격차를 해소하지 못
하여 재선에 실패하곤 하였는데, 클린턴 대통령의 경우 르윈스키 성추문 사건과 이
에 따른 탄핵소추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기대 이상으로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 것
을 보면 능력도 있겠지만 운도 따르는 지도자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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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07.11
  • 저작시기2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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