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정책과 정부기구 -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성립과 기능 및 변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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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화정책과 정부기구 -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성립과 기능 및 변천과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개화정책과 정부기구

I. 통리기무아문의 성립

II. 통리기무아문의 기능

III. 통리기무아문의 변천

IV. 해관

본문내용

고 개칭하였다.
1882년 12월 4일 내무아문을 '통리군국사무아문'으로, 외무아문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개칭한 후 5일 양 아문의 분장사무과 인사배치를 발표하였다.
통리군국사무아문은 군국기무와 내정 일체를 관리하며 이용사 군무사 감공사 전선사 농잠사 장내사 논상사의 7사를 두었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외교통상 관계를 전담하였으며, 정권사 장교사 부교사 우정사의 4사를 분치하였다.
4. 해관
일본의 강요로 조일수호조규와 수호조규부록, 무역규칙십칙 등 불
평등조약을 체결하고 무관세무역을 인정하게 되었다. 부산 개항 후
이 실책을 깨달은 조선정부는 해관 설치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878년 9월 부산 두모진에 수세소를 설치하여 수출입세를 부과하였
다. 그러나 조선상인에게만 제한된 징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
본의 협박과 이홍장의 권고로 11월 26일 이를 정지하였다.
그러나 관세의 설정은 조선 측의 긴급한 과제였으므로 일본에 수
신사를 파견, 이의 시정을 요구하였고, 중국의 지원으로 1882년 5
월 한미수호조규에 관세자유권과 관세율을 명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임오군란 후 청의 간섭이 강화되면서 묄렌도르프가 통리교
섭통상사무아문의 협변으로 총세무사의 직을 겸임하여 해관을 창설
하고 일본과의 관세설정 문제도 타결되었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독단으로 일본에 유리한 통상장정과 해관세측 초안을 작성하여 저
율관세를 인정하자 영국도 이에 항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5% 기준
의 관세율 적용이 조인되었다.
1883년 청의 세관 제도를 도입하고, 1883년 6월 '해관세'의 시행
을 공포한 뒤, 8월 인천 부산 원산 등 통상항구에 감리를 설치하
였다. 9월에는 개항장의 해관세 수세 업무를 일본 제일은행 각 지
점에 위탁하는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1883년 11월에 해관을
설치하여 수세사무를 개시하였다. 조선정부는 감리를 임명하였으며
총세무사 묄렌도르프 밑에 중국인 등 외국인 세무사를 두는 이원체
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청의 영향이 켰기 때문에 실권은 총세무사
에게 집중되어 해관의 실제 사무는 한국인 감리가 아닌 외국인 세
무사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그 후 시정되지 못하고
외국인에게 장악되었다.
해관과 총세무사는 원래는 통리기무아문에 속해 있었으나 갑오개
혁 때 도지부로 이속되었고, 1904년(광무 8년) 일본인 재정고문이
총세무사를 겸임하면서 해관이라는 이름을 세관이라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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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5.07.11
  • 저작시기2015.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76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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