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통령 보좌기관 {내각, 대통령 행정집무실, 백악관 비서실, 부통령, 영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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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국의 대통령 보좌기관 {내각, 대통령 행정집무실, 백악관 비서실, 부통령, 영부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미국의 대통령 보좌기관

I. 내각

II. 대통령 행정집무실

III. 백악관 비서실

IV. 부통령

V. 영부인

본문내용

통령, 부통령이 함께 참석한 적이 있는데 통상적으로 외부행사에는 정 부통령이 같이 참석하지 않는 것을 고려할 때 부통령의 관심분야인 환경문제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대통령의 배려로 생각되었다. 그는 국가업적평가위원회(National Performance Review)를 주관하면서 정부 재창조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최근 민주당의 고어 부통령이 정치자금 모금 스캔들과 관련하여 정직하고 깨끗한 이미지가 손상을 입은 듯하지만 1997년 겨울 일본 교토에서 열린 지구온난화방지회의, 1999년 1월 워싱턴에서 열린 '정부개혁을 위한 세계포럼'을 주관하는 등 그의 활동 폭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은 고어 부통령을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정치자금 모금행사를 계속하는 등-사실 클린턴 대통령 자신은 정치자금 모금의 필요성이 없는 상태이다-통상적인 대통령과 부통령 간의 관계에서는 즘처럼 보기 힘든 배려를 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클린턴 대통령의 인간미와 고어 부통령의 인간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으로서 결국은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르윈스키 성추문과 탄핵소추의 과정에서 궁지에 몰린 클린턴 대통령을 옹호하기 위하여 언론에 나타난 앨 고어의 모습은 결코 등 뒤에서 비수를 들이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그가 클린턴 대통령을 소개하면서 큰 목소리로 청중을 향해 외치던 모습은 전에 보던 조용하고 영어선생 같은 말투의 앨고어가 결코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대통령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최근에 고어 부통령이 2000년 대통령선거에 공식적으로 출마를 선언하면서 클린턴 대통령과의 정치적 차별화를 시도하여 두 사람간의 정치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5) 영부인
대통령 위상의 변화만큼 영부인(First lady)의 역할과 위상도 많이 변화하였다. 종전에는 백악관의 안주인으로서 의전적 역할에 만족하였으나 엘리너 루즈벨트(Eleanor Roosevelt) 여사를 시발점으로 남편의 선거운동과 각종 캠페인에 깊이 관여함은 물론 대통령 대신 주요 행사에 참석하여 대중연설을 하는 등 대통령의 정치적 동반자로서, 조언자로서 과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대통령 보좌관들은 대통령에게는 나쁜 보고를 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지만 영부인에게는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다. 낸시 레이건 여사는 대통령 고위 보좌관들의 월권과 독주로 부작용이 심화되자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비서실장과 법무장관을 해임한 것이 그 예이다.
영부인은 시중의 여론을 가감 없이 대통령에 전달하기도 한다.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가 처음 시도했던 것으로 그녀는 전국을 여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여론을 청취하고 국가분위기를 대통령에게 전달하였으며, 신문에 매일 "나의 하루"(My Day)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그녀는 또 여성운동, 빈곤퇴치, 고용촉진 등 수많은 인도적 프로그램을 추진하여 당시 가장 영향력이 큰 여성이었을 뿐 아니라 활동적인 인사로 평가되었다. 그녀는 후임 영부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기준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348회에 달하는 기자회견은 그녀가 얼마나 활동적이었나를 보여주며, 1997년 7월 개관한 루스벨트 기념관에 영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자리한 것은 후세 사가들의 평가도 생존시에 못지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 걸음 나아가 영부인은 정책분야에까지 참여하고 있다. 로잘린 카터(Rossalynn Carter) 여사는 처음으로 국무회의 정규멤버로 참석하였고 낸시 레이건 여사는 불법 마약 추방을 위한 캠페인(Jt따 Say No)을 전개하였다. 재클린 케네디(Kennedy) 여사는 영부인을 공식기관화한 최초의 영부인이다. 처음으로 공보비서를 임명하였고, 곧이어 40명 정도로 구성된 영부인 비서실을 설치하였다. 이때부터 영부인의 활동상황이 신문 사회면에 등장하지 않고 정치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백악관을 우아하고 고상하게 가꾸고 자선사업, 문화, 예술행사를 후원하면서 어쩌면 미국인들이 향수처럼 그릴지도 모르는 왕가의 품위와 위엄을 몸으로 실현하였다.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클린턴 후보가 "만약 자기를 찍으면 하나 값으로 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농담할 때부터 벌써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여사의 정부 내 역할은 짐작되었다. 선거가 끝나면서 많은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특히 클린턴 정부 집권 1기 때의 최대 역점사업이었던 의료개혁 추진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대통령 집무실 옆에 처음으로 영부인실을 만든 그녀는 심지어 '공동 대통령'이라고까지 불렸다.
영부인의 독특한 위치, 즉 이혼할 수는 있어도 절대로 해고당하지는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대통령에게 직언할 수도, 정부정책이나 인사에 개입할 수도, 인의 장막을 쌓을 수도 있다. 영부인의 전통적인 역할(의전 및 사회봉사)에 비중을 두는 사람들은 영부인이 정치문제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을 좋게 보지는 않는 것 같다. 법률은 대통령 직계가족이 연방정부 내에 공식직함을 가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보수 없이 대통령이 지시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정부 외에서 보수를 받는 직책을 가지는 것은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본래 영부인은 정치적인사라기보다는 국가적 상징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언론의 비난이나 정치권의 공격에서는 멀찌감치 피해 있으며 국민으로부터는 따스한 시각을 받고 있다. 마치 자유의 여신상을 공격하는 만큼이나 영부인을 공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인식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한창일 때에도 첫 닉슨(Pat Nixon) 여사를 공격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클린턴 여사에 와서 사정은 바뀌었다. 화이트워터 사건, 백악관 여행 사무실 직원해고 등으로 제소를 당하는 등 그녀가 활동하는 만큼 언론, 정치권의 비판도 높아졌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이 르윈스키 성추문과 탄핵소추의 과정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그의 남편을 확고히 지지하여 인기가 매우 높아졌다.
클린턴 여사는 2000년 뉴욕주 상원의원 선거에 공식적으로 출마를 선언하였다. 그녀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공직선거에 도전하는 영부인이 되어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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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07.11
  • 저작시기2015.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76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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