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전포고를 하게 되어 소련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8월 이 회담에 참가하고 이 선언문에 함께 서명하였다.
이 선언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제1~5항은 전문(前文)으로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인류와 일본국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6항은 군국주의의 배제, 제7항은 일본영토의 보장점령, 제8항은 카이로선언의 실행과 일본영토의 한정, 제9항은 일본군대의 무장해제, 제10항은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강화, 언론 종교 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존중의 확립, 제11항은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유지의 허가, 제12항은 민주주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점령군의 철수, 제13항은 일본군대의 무조건항복을 각각 규정하였다.
특히 제8항에서는 카이로선언의 모든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 홋카이도[北海道] 규슈[九州] 시코쿠[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라고 명시하여 카이로선언에서 결정한 한국의 독립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소련도 8월 8일 참전하여, 10일 일본은 이 선언을 수락, 14일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끝났다.
이든 :
더럼주(州) 윈들스톤 출생. 옥스퍼드대학교 재학 중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 그 후 1923년 보수당 후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34년 국새상서(國璽尙書), 1935년 국제연맹담당장관외무장관이 되었는데, 총리 N.체임벌린의 대(對)독일이탈리아 유화정책에 반대, 1938년 사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더불어 체임벌린내각에 다시 입각하여 자치령장관육군장관외무장관 등을 역임하였는데, 4년 8개월에 걸친 외무장관 재임시에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 W.처칠내각의 전시외교의 지도자로서 실력을 보였다.
1951년 제2차 처칠내각에서도 외무장관부총리를 지냈으며, 1955년에는 처칠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수에즈운하 출병사건으로 1957년 인책사임을 하고, 회고록 집필 등에 전념하였다. 외무장관 시절에는 인도차이나 휴전을 위한 제네바회의에 참석하였으며, 서독의 재군비를 인정한 파리협정 체결에도 힘썼다. 그는 당시의 노동당 당수 C.애틀리와 함께 인신공격을 가장 적게 받은 정치가였으며, 대중민주주의국가의 최종발전단계인 복지국가에서 보수당 지도자로서 적격성을 보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선언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제1~5항은 전문(前文)으로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인류와 일본국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6항은 군국주의의 배제, 제7항은 일본영토의 보장점령, 제8항은 카이로선언의 실행과 일본영토의 한정, 제9항은 일본군대의 무장해제, 제10항은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강화, 언론 종교 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존중의 확립, 제11항은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유지의 허가, 제12항은 민주주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점령군의 철수, 제13항은 일본군대의 무조건항복을 각각 규정하였다.
특히 제8항에서는 카이로선언의 모든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 홋카이도[北海道] 규슈[九州] 시코쿠[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라고 명시하여 카이로선언에서 결정한 한국의 독립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소련도 8월 8일 참전하여, 10일 일본은 이 선언을 수락, 14일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끝났다.
이든 :
더럼주(州) 윈들스톤 출생. 옥스퍼드대학교 재학 중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 그 후 1923년 보수당 후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34년 국새상서(國璽尙書), 1935년 국제연맹담당장관외무장관이 되었는데, 총리 N.체임벌린의 대(對)독일이탈리아 유화정책에 반대, 1938년 사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더불어 체임벌린내각에 다시 입각하여 자치령장관육군장관외무장관 등을 역임하였는데, 4년 8개월에 걸친 외무장관 재임시에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 W.처칠내각의 전시외교의 지도자로서 실력을 보였다.
1951년 제2차 처칠내각에서도 외무장관부총리를 지냈으며, 1955년에는 처칠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수에즈운하 출병사건으로 1957년 인책사임을 하고, 회고록 집필 등에 전념하였다. 외무장관 시절에는 인도차이나 휴전을 위한 제네바회의에 참석하였으며, 서독의 재군비를 인정한 파리협정 체결에도 힘썼다. 그는 당시의 노동당 당수 C.애틀리와 함께 인신공격을 가장 적게 받은 정치가였으며, 대중민주주의국가의 최종발전단계인 복지국가에서 보수당 지도자로서 적격성을 보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