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50년대 제주 4. 3항쟁의 역사적 의미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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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목 차 ]

Ⅰ. 서 론

Ⅱ. 본 론
1. 4.3제주항쟁 원인의 불씨
2. 제주 4.3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1) 제주 4.3사건의 배경
2) 항쟁의 전개과정
3. 제주 4.3의 원인에 대한 기원의 재론
1) 거시적인 역사적 배경과 보다 가까운 직접적인 원인
2) 제주도적인 것과 전국적인 것
3) 이념과 도덕; 제주민중의 지향
4) 객관적 요인과 주체적 요인에 대하여
4. 제주 4.3항쟁 발발의 해석
5. 제주 4.3의 성격
6. 제주4.3의 내용과 전개
1) 장기화 - 사태확대의 요인과 이유
2) 미국군정과 미군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구체와 해석의 문제
3) 민중의 대량학살의 문제- 누가 학살의 주체이며 원인인가.
4) 지도부의 전술과 대응
5) 민중의 반응 - 급진주의에 대한 평가의 문제
6) 북한과 제주4.3- 북한의 남한 게릴라투쟁에 관한 인식의 정리
7. 제주4.3의 또다른 의미

Ⅲ. 결론:민주화와 역사인식의 문제

참고문헌

본문내용

어야했지 않았나 보여진다. 역사의 주체들은 타협의 기술을 배워야.
5) 민중의 반응 - 급진주의에 대한 평가의 문제
민중의 반응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45년-48년의 민중심성은 분명히 김달삼네 들에게 있었다. 4월 3일 이후에도 초기에는 지지. 그러나 후반부에는 뚜렷한 지지를 찾기 어렵다. 그것은 물론 경찰과 청년단의 진압과 만행으로 이에 처음에는 저항하다가, 고통의 정지를 위해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측면도 있었다.
6) 북한과 제주4.3- 북한의 남한 게릴라투쟁에 관한 인식의 정리
김달삼. 그를 정리하는 것은 50년 이전의 한국게릴라투쟁의 전모를 밝히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다. 북한정부수립에 참여한 뒤 김은 49년 7월 게릴라부대를 이끌고 남하.(50년들어 그가 이끄는 부대의 이름은 43부대- 가장 강력한 부대. 다른 부대들은 38부대, 322부대. 각각 4ㆍ3,38선, 3ㆍ22총파업을 기념하여 붙인 것이다.) 이는 6월 조국전선의 호소로 남한에서의 투쟁이 격렬해지고 게릴라남파를 본격화하던 시점이다. 김달삼은 남하와 함께 곧바로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부상함. '남한게릴라 제일의 지도자'(No.1 guerrilla leader in South Korea ) --- 주한미국군사고문단 정보보고의 공식기록 --- 로의 부상.
미군의 방대한 정보보고를 종합할 때 1950년 6월 이전의 남한빨치산의 제일지도자는 이현상이 아니라 김달삼이 분명. 50년 4월 3일 월북. 박헌영 이승엽 들을 만나고 남한에서의 게릴라투쟁에 대해 논의한 뒤 다시 전쟁 직전에 월남. 남도부는 김달삼부대의 부지휘자.
북한에서의 제주4ㆍ3논의와 인식; 남한에서의 가장 대표적인 빨치산투쟁으로 인식하였다. 남한의 빨치산 투쟁을 언급할 때면 제주4ㆍ3은 항상 언급된다. 단선단정반대, 선거파탄, 뛰어난 전과, 김달삼의 북한정부수립에의 참여 등이 주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덕구에 대한 평가도 대단히 높다. 오늘날 북한의 애국열사릉에는 제주4ㆍ3과 관련하여서는 주요한 지도자 중 세 명이 들어있다. 김달삼, 이덕구, 강규찬이 그들이다. 세 명이라는 이 숫자는 남한 전체 게릴라지도자 중에서도 대단히 그 비율이 높은 것. 다른 지도자들은 이현상, 박영발, 방준표 등 몇 명에 지나지 않아.
7. 제주4.3의 또다른 의미
그렇다면 제주4ㆍ3항쟁은 무엇인가. 또 그 의미는 무엇인가.
1948년 4월에 분단질서인 '48년질서'가 형성되어 가는데 대한 저항은 두 수준이었다. 하나는 평화적 협상, 다른 하나는 밑으로부터의 저항. 제주4ㆍ3은 후자의 대표적 사례였다. 통일국가가 수립된 후 이것은 가장 대표적인 통일운동의 역사로 위치지어져야 할 것이다. 이는 또한 중심부 미국에 대한 문제제기도 갖고있다. 그러나 아마도 이 세 번째 수준은 강조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비록 맞물린 것이지만 이 세 가지 수준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 제기되었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한국의 역사에서 이 사건이 차지하는 위상은 무엇인가. 이것에 검토가 아마도 이 논의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먼저 한가지만 지적하면, 제주4ㆍ3항쟁에서는 게릴라 투쟁과 관련하여 사실상 모든 것이 다나왔다. 그것은 여순, 그리고 본토에서의 게릴라투쟁, 나아가서 1950년의 폭발에 대한 하나의 사전예고이자 그 자체가 축소판이었다.
Ⅲ. 결론:민주화와 역사인식의 문제
그것은 왜 다시 논의되고, 밝혀지고, 규명되고, 정당하게 자리매김되지 않으면 안되는가.
먼저 우리는 하나의 문제를 역으로 제기할 수 있다. 이 발제가 너무 제주도적인 것을 강조한 것은 아닌가. 그러나 이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다. 40년대와 50년대의 한국의 역사는 중심부가 무책임하게 그었던 분계선이 한국민족의 전체 역사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국의 농촌을 파괴하고 민중의 삶을 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는지를 제주4ㆍ3은 말해 주고 있다.
한국에서의 시대의제(epochal agenda), 국가-민족의제(national agenda)의 해결방법은 수동혁명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이것이 현대한국의 비극의 한 단초이자 귀결이다. 45년,50년,60-61년,80년,87년,5번의 계기가 시사하는 것은 모두가 문제제기의 주체ㆍ방법과 해결의 주체ㆍ방법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특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는 그 사후적 해결에서도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제주4ㆍ3항쟁문제의 해결은 수동과 능동의 결합일 수밖에 없다. 시대의 변환이 내용을 가지려면 그 변환을 있게 한 앞시대의 의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곧 수동적 방법으로라도 앞 시대의 의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변화는 없는 것과 같다.
현대한국의 4대 민중학살사건인 제주4ㆍ3과 여순, 거창(함양-산청),광주의 차이는 심중하다. 전자가 가장 공개되지 않고 해결에 난색을 드러내는 이유는 바로 남한정부의 정통성과 직접 불가분의 관련이 있기 때문. 제주4ㆍ3에 대한 공식적 논의의 회피와 무책임은, 적어도 역사인식과 대처에서는 과거의 군사권위주의정권과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을 의미한다.
1970년대와, 특히 1980년대의 민중의 민주화투쟁이 없었다면 민간정권은 기본적으로 성립불능. 오늘의 문민정부가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문민성'을 무색케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제주4.3연구소 역, 2000,《제주4.3자료집 : 미군정보고서》, 제주도의회
정용욱, 2003,《미군정자료연구》, 선인
정용욱, 2003,《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출판부
조남현, 1993,《제주 4.3사건의 쟁점과 진실》, 돌담
아라리연구원, 1988,《제주민중항쟁 2》, 소나무,
제민일보 4.3취재반, 1994,《4.3은 말한다》, 전예원
서중석, 1991,《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역, 1986, 《한국전쟁의 기원》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선인
제임스 I. 매트레이, 구대열 역, 1989,《한반도의 분단과 미국-미국의 대한 정책: 1941-1950》,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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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28
  • 저작시기2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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