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국문)훈민정음 창제에 대하여 세종의 친제와 어제임을 주장한 논문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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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어국문)훈민정음 창제에 대하여 세종의 친제와 어제임을 주장한 논문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序
Ⅱ. 本
1. 훈민정음 비친제(어제御製)설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
2. 훈민정음 친제설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

참고자료 및 문헌

본문내용

創制)라는 부분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지도 모른다. 신하들과 함께 만들었어도 임금이 명한 것이니 그렇게 명시한 것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세종조 시대, 세종이 명한 많은 사업 중에서 임금이 직접 했다고 명시한 것은 훈민정음뿐이다. 당시 조선의 건국 초여서 각종 제도와 문물, 기구등의 사업이 많이 실행되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일일이 책임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공을 임금한테 돌리기 위해 했다고 하더라도 당시엔 최만리 등의 상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훈민정음의 창제는 임금의 업적을 기릴만한 "공"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하창제(殿下創制)라고 한 것은 실제로 세종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도맡다 시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최만리의 상소에도 나타난 친제설의 근거
최만리의 상소 자체에서도 증명되는 데, "이번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가지 재주에 지나지 못하는 것으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언문'의 창제는 신기한 재주를 부린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전혀 유익할 것이 없다고 혹독한 비판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세종은 최만리가 이두로 충분하는 데 언문을 만든 것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너희가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라고 하여 설총이 만든 이두는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한 일을 그르다고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며 반박하고 있다. 이는 스스로 자신이 '언문'을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어떤 기록에도 한글 창제를 다른 사람에게 명했다던지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다. 특히 이 같은 이 사실은 훈민정음 서문의 글을 통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또 혹자는 아무리 그래도 믿을 수 없다, 어찌 세종 혼자 만들 수 있었겠는 가? 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세종은 스스로 음운학의 대가로서 집현전 부제학인 최만리를 앞에 두고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라고 면박을 준다. 세종의 다른 말에는 일일이 반박하던 최만리도 여기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세종을 도와 한글의 반포에 도움이 된 것은 왕자와 옹주들이었다. 최만리등의 기존의 집현전 노학들이 한글과 관련되어 있는 일은 '언문' 창제에 극렬한 반대를 한 것 뿐이지만, 왕자와 옹주들의 역할은 '언문'의 첫 적용대상이 된 "운회"의 번역 등의 한글 서적 제작에서 민간의 언어에 대한 '언문'의 실제 적용까지 이르렀다.
참고자료 및 문헌
이기문(李基文), 1992. 훈민정음(訓民正音) 친제론(親制論) 논문. 韓國文化
리홍매, 중국조선어문 1997년 제6호, 1997. 11 이 권 / 호 내 논문. 훈민정음 친제설과 비친제설
강신항(姜信沆), 1963. 훈민정음해례 이론과 성리대전과의 관련성. 국어국문학 26.
김민수(金敏洙), 1964. 신국어학사.
  • 가격3,6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9.09.16
  • 저작시기2009.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2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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