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전개과정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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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Ⅰ. 제1단계(1950년 6월 중순~9월 중순)

Ⅱ. 제2단계(1950년 9월 중순~10월 하순)

Ⅲ. 제3단계(1950년 10월 하순~51년 6월 중순)

Ⅳ. 제4단계(1951년 6월 하순~53년 7월 중순)

*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정치적 해결이라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휴전협상의 첫 번께 문제는 군사분계선의 설정 문제였다. 공산측은 38'선을
주장했고, 유엔군 측은 유엔군 측의 제공권과 제해권에 대한 보상으로 지상대치
선보다 훨씬 북쪽의 분계선을 주장했다. 양측의 이러한 이견으로 군사분계선에
대한 합의가 지연되면서 양측의 군사적 대치가 다시 전면화 되었다. 즉 유엔군
은 지상에서 하기공세와 추기공세를 감행하였고 공중에서는 공산 측의 보급과
통신을 중단시키기 위한 질식(strangle)작전을 전개하였으며, 이에 대해 북한 측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게 된 것이다. 결국 12월 27일 쌍방은 현 접촉
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양측이 각각 이 분계선으로부터 2km 씩 후퇴하여 군
사정전기간 비무장지대를 설정하기로 합의한다.
휴전감시문제는 5개월간의 협상 끝에 체코, 스위스, 스웨덴, 폴란드 등 4개국
으로 중립국감독위원회를 구성하고, 휴전감시를 위한 출입지역은 방방 5개 지역
으로 합의하게 된다. 그리고 정치회담의 문제도 군사문제의 우선적 타결을 고려
한 양측 의도와 맞아 쉽게 타결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포로교환문제였다. 1952년 5월 현재 합의되지 못한 유일한
문제는 포로송환 문제였다. 포로송환문제는 1951년 12월부터 협상이 시작되었으
나 미국 측이 인도주의적 자원송환 원칙을 제시하고 북한 측은 강제송환을 주장
함으로써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한 측의 주장에 의하면 국제적인 관행에
도 어긋나는 미국 측의 자원송환 원칙은 포로의 의사를 심사한다는 명분 하에
북한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포로들을 강제로 억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
다. 그리하여 포로송환문제의 해결은 18개월이 걸렸으며, 따라서 전쟁의 종전
은 그만큼 지연되면서 전쟁의 피해를 증대시키게 된다.
군사분계선 설정문제와 전쟁포로송환문제 등을 중심으로 정전회담의 결렬과
재개가 계속된 끝에 마침내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M. Klark), 조선인민군 총사
령관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사이의 정전협정이 53년 7월 27일 체결되었다. 전쟁의 제4국면은 시간적으로 2년여의 기간에 해당된다. 휴전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입장이 휴전과 장기간의 양면정책이라 할지라도 전쟁을 수행하는 북한
측의 고통은 대단히 켰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남한 해방에 대해서는 전쟁의 3국
면에서부터 거론되지 않고 있으며, 이후 전쟁의 목적은 북한지역을 방어하고 정
당한 조건 속에서 정전을 이룩하는 데 한정되고 있었다.
후방의 전시정책에 있어서는 당재건에서의 관문주의 . 책벌주의 문제, 전시
생산의 증대를 위한 각종 조치 등이 거론되고 있었다. 당재건에서의 책벌주의 관
문주의에 대한 비판은 당대열의 확대강화에 있어서 관문주의와 책벌주의로 인해
당의 성장이 저해된 데 대한 비판으로서, 1951년 11월에 있었던 조선로동당 중
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에서 전면적으로 제기되었다. 소련파의 대표격인 허가
이는 관문주의, 책벌주의의 오류로 강하게 비판받았다.
김일성은 1952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노동당의
조직적 사상적 강화는 우리 승리의 기초'라는 보고를 통해 당내 남아있는 종파
주의적 경향들과 자유주의적 경향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당을 조직 사상적으
로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과업을 제시한 바 있다. 이 결과 당내 자리 잡고 있
던 관료주의 자유주의 영웅주의가 결정적 타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특히 박헌
영 이승엽 등의 남로당계열이 간첩도당과 종파분자라는 죄상으로 재판에 회부
되었다.
북한은 자유주의와 관련하여 "자유주의자들은 소부르조아적 자기본위사상에
서 출발하여 개인이익에 복종시키지 않는 당성이 없는 자들"이라고 정의하고,
"종파주의는 소부르조아적 개인 영웅주의, 공명출세주의 산물로서 그 상습적인
사업방법은 직위다들과 상호이간 책동이며 간교한 외교와 모해이며 개인숭배사
상의 전파와 부식"이라고 인식하였다. 종파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을 때 당중
앙이 통일되지 못하고 곁으로만 받들고 속으로는 음해함으로써 사실상 여러 개
의 중앙이 있게 되며 지방주의적 경향과 규합되어 반당적인 소그룹적 행동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인식이다.
다른 한편 유엔군 점령 당시의 파괴와 더불어 휴전회담 과정에서 유리한 입지
를 점하기 위한 미국 측의 군사적 압력에 의해 북한의 생산시설이 거의 파괴되
고 노동력이 절대 부족한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노동력 부
족을 타개하기 위해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농업생산 및 상공업에서
협동적 노동형태가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북한의 전쟁중 '반종파투쟁'에 대해서도 당시의 주요 전쟁정책 및 정확
한 전쟁전략과 관련하여 좀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종합규명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 후방정책실패와 책임자 철직문제의 경우, 당시의 전쟁발발구조로 볼
때 북한이 '제한적 남침'을 시도하면서 충분한 후퇴전술과 후방정책을 마련해
두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오히려 후방정책실패의 책임은 당의 최고지도부
에 더 크게 지워져야 했던 것이다. 둘째, 박헌영 등 남로당계열의 숙청문제에 있
어서도, 실제로 간첩행위를 했는지와 반김일성 쿠데타를 시도했는지에 대한 충
분한 사실 확인이 되지 않고 있지만 이와는 별로도, 남로당계열의 전쟁정책이나
주장에 대한 책임부분이 구체적 조건 속에서 객관적으로 분석되어져야 할 것이
다. 이 같은 사실에 입각할 때 박헌영 등 남로당계열의 숙청문제는 북한 특유의
반종파투쟁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실제적인 정책과 저라
의 대립 속에서 책임문제와 권력투쟁이 중복되어 작용된 것으로 재해석하는 것
이 훨씬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평가가 되지 않을까 한다.
* 참고문헌
- 곽승지, 김정일시대의 북한이데올로기, 통일정책연구, 2000
- 박형중, 북한적 현상의 연구: 북한 사회주의건설의 정치경제학, 1994
- 신일철, 북한 주체철학의 비판적 분석, 사회발전연구소, 1987
- 이만우, 북한의 통일정책, 한국과 국제정치, 1987
- 이종석, 새로쓴 현대 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 · 엥겔스 저작선, 1988

키워드

영향,   요인,   정의,   개념,   문제점,   배경,   방안,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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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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