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를 단조롭게 바라보는 껍데기 같은 시선을 탈피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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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419를 단조롭게 바라보는 껍데기 같은 시선을 탈피하기 위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머리말
II. 4.19란 무엇인가
1. 통념을 양산하는 역사 교과서와
문학 작품 속 4.19의 모습
2. 4.19 명칭의 변화 양상
3. 4.19의 추이
III. 4.19에 참여한 국내 여러 집단들의
참여 양상
1. 4월 19일 이전의 주요 사건들 및 4월 19일
1) 진보당사건 2) 3.15 부정선거
3) 마산시위 4) 4.18 5) 4.19
2. 4.19 혁명 주체들의 다양한 요구사항들
1) 시기순 정리 2) 집단별 정리
3. 4.19 ≠ 이승만 퇴진 운동
IV. 미국의 4.19 개입 모습
V. 4.19에 연관되어 있는 남북 통일 논의
VI. 맺음말

본문내용

있었다. 하지만 진보당은 당시 국제정세의 추세가 ‘반전과 평화를 희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보았다. 전쟁이 없이도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던 셈이다. 이는 주로 젊은 층과 학생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이 관점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서 휴전 이후 미국과 중국 양측이 전쟁을 회피하며, 양 진영 사이의 냉전이 장기화되는 방향으로 가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북진통일론은 민중과 야권 세력 모두에게 정치 공세의 목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는 별 성과 없이 끝난 전쟁에 대한 후유증과 이산가족 문제도 얽혀있다. 북진통일론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수면 위로 오르자 이승만 정권에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산발적 혹은 계획적으로 일어나는 통일운동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정권유지의 명분이자, 그들이 휴전 이후 본격적으로 주장했던 무력북진통일론이 위협받는 것은 곧 그들의 정권안보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정권의 유지와 그들이 국시로 삼은 북진통일의 수호를 위해 더욱더 노골적, 폭압적인 물리력에 의존해야 했고, 이는 4.19의 또 다른 신호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4.19가 직접적으로 통일운동을 구호로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위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는 무력 북진통일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과잉된 물리력을 통해 진압한 것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의 정권유지를 위한 수단이었던 북진통일론은, 결국 이승만 하야를 외치는 데 일조한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난 후, 그 전과 다르게 통일에 대해 비교적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게 된 분위기 속에서 그동안 금기시 되고 진압의 대상이 되었던 다양한 통일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단순히 정치세력들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의 통일에 대한 목소리 또한 높아졌다는데서 의의가 있다.
이에는 자신들의 손으로 혁명을 이루어냈다는 ‘민족주의의 고취’도 한몫했다. 그리고 이 밖에도 미국이 이승만의 하야를 그냥 두고 보았다는 사실 또한, 일반 민중으로 하여금 미국이 남북한의 통일을 원하고 있다는 행동의 신호로 보게 하였다. 정부가 바뀌면서 사람들의 기대는 통일로 향했고, 각 정당들도 자신의 당론과 부합하는 여러 가지 통일론을 탄생시킨다. 이 때 등장한 통일론에는 ‘평화통일론’, ‘중립화 통일론’,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제창하는 ‘선건설 후통일론’ 등이 있다. 결국 4.19는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통일운동의 움직임에 활기를 더하고, 그 논의를 활성화 시킨 의의가 있는 것이다.
cf) 통일운동 논의에 대한 평가
그러면서도 4.19혁명의 통일이상은 반공통일과 북진통일 노선 속에 묶여 있었고 관변통일논리에 지배되어 있었던 동토에 신선한 통일논의의 지평을 열어 줄 수 있었다. 또한 4.19 통일 이상은 언젠가는 통일 문제가 민족우선주의로 귀착되고 말 먼 훗날의 민족 이데올로기를 차디찬 냉전기류 속에서도 떠올려 줄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정용석, 『4·19혁명의 통일이상과 현실』, 150쪽
한편 이 시기는 민간차원의 통일논의와 운동이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강하게 분출되었다. 1960년 11월 서울대 민족통일연맹의 결성을 기점으로 4.19의 주도세력이었던 학생층은 통일운동으로 관심과 역량을 집중했고, 혁신정당과 다른 사회운동 세력들도 마찬가지였다. 1961년 2월 대부분의 혁신정당과 진보적 사회운동 세력을 망라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가 결성되어 본격적인 통일운동을 추진할 조직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당시 통일운동은 선전과 계몽운동의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는데, 5월 들어 서울대 민족통일연맹의 남북학생회담 제안을 계기로 구체적인 활동목표를 내걸고 대중을 동원하는 실천적인 통일운동으로 전화할 조짐을 보였다. 한국역사연구의 4월민중항쟁 연구반, 『4·19와 남북관계』, (민연, 2001) - 홍석률, 정창현, 「4월민중항쟁의 연구와 쟁점 과제」
VI.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4.19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배경과 원인을 분석하고 그 후의 영향을 알아보았다. 앞서 머리말에서 시작했듯이, 우리 조는 4.19가 단순히 민주화 운동 외에도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맨 처음 진보당 사건, 3.15 부정선거와 김주열 사태, 마산시위로 촉발된 4.19의 신호탄은 혁명의 정점인 4월을 지나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불러왔다는 것만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4.19의 전반적 모습의 전부였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이승만의 하야’는 학생주도로 일어난 최초의 구호는 아니었다. 학원의 자유와 공명정당한 선거 및 법 진행의 촉구를 요구했다. 대한민국에서의 민족적 민주주의 구현이 시위대의 1차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시위가 유혈사태로 진행되면서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외치기 시작했다.
점차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방관할 수도 개입하기도 애매한 입장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점차 시위대의 연령층이 다양해지면서 넓어지고, 시민항쟁의 면모를 갖추게 되면서, 미국이 적극적으로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다. 미국의 개입은 시위대에는 힘을 얻었으며, 미국은 남한의 안보이익을 수호하는 효과를 보았다.
4.19의 일환으로 등장한 통일운동은, 시위 주도세력으로 하여금 이승만의 하야를 외치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비록 통일운동이 정착되는 과정-기존의 과격한 무력북진통일론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정치 세력이 개입되어 그 순수성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남북한이 한민족이라는 민족주의의 고취 아래 실시된 4.19 주도세력이 내건 통일의 슬로건은 이후의 통일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다.
물론 4.19는 민주화 운동의 시초로서 그 역사적 가치가 충분히 있다. 하지만 오직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일종의 항쟁으로만 치부해서는, 4.19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하기 힘들다. 모든 역사적 사실을 바라봄에 있어 그러하듯, 급진적인 사회 변혁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의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 조의 보고서와 발표가 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길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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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03.25
  • 저작시기20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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