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과 ‘사람의 아들’ 의 대결 - 이문열 사람의 아들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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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람의 아들’ 과 ‘사람의 아들’ 의 대결 - 이문열 사람의 아들 서평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소설 속 민요섭과 ‘소설 속 소설’ 아하스 페르츠의 행적
1. 민요섭의 죽음
2. 민요섭 속 소설 아하스 페르츠 이야기
1) 아삽의 부인 - 지상의 삶에 대한 찬미, 죄에 대한 의문
2) 아하스 페르츠의 신을 찾는 방황
3) 아하스 페르츠와 예수의 만남
4) 아하스 페르츠와 유다
5) 예수의 죽음
3. 민요섭과 조동팔

Ⅱ. 과연 ‘신’은 누구인가? - 소설을 통한 ‘신’ 의 재해석
1. 피관찰자가 관찰자로 바뀌는 쾌감 – 기독교의 ‘신’ 의 유래
2. 신의 속성에 대한 의문 - 과연 신은 과연 인간을 사랑하는가?
3. 지혜의 영으로 설정된 사탄 - 과연 신과 사탄은 대립적 존재인가?
4. 죄란 무엇인가? - 인간에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부여된 것 아닌가?
5. 영원이란 무엇인가?
6. ‘사람의 아들’ 과 ‘사람의 아들’ 의 흥미진진한 대결

본문내용

- 인간에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신에 의해 일방적으로 부여된 것 아닌가?
기독교에서는 아담의 원죄 이후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한다. 인간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고 이 죄를 사하여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 란 무엇인가? 애초에 누군가가 ‘죄’ 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죄’ 가 된 것 아닐까? 누구든 일단 본인이 죄인의 입장이면 일단 머리를 숙이는 자세가 되기 마련이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함으로써 신의 우위를 점하는 것 아닐까?
따라서 아하스 페르츠는 줄곧 에수 그리스도에게 묻는다. 그렇지 않아도 각종 삶의 짐으로 허리가 휠 것 같은 인간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어주려고 왔냐고. 그냥 우리를 내버려 두라고. 더 나아가 죄를 죄라고 규정한 쪽의 의도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CCTV 속 인물이 렌즈 너머를 바라보고 추측하는 행동,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이 작가를 의식하는 행동, 즉 피관찰자가 관찰자가 되는 발칙하고 기발한 전복이 한 번 더 나타난다. ‘죄’ 가 아니면 굳이 ‘용서’를 받지 않아도 되고 신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아도 된다. 절대자를 의식하지 않고 죄책감 없이 눈앞의 즐거움을 누려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 의식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지, 누구나 자기 좋은 대로, 원하는 대로 살면 그 무질서와 부조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5. 영원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경건한 믿음의 삶을 살면 죽음 후의 영원한 천국을 약속한다. 사후 세계를 모르는 인간 입장에서는 얼핏 달콤하게 느껴지는 교리이나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면 이 세상이 하찮고 보잘 것 없이 느껴지는 부작용이 있다. 이 세상은 그냥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가기 전에 잠깐 들르는 정거장, 잘 치러내야 하는 시험장 정도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만, 살아있는 동안만 누릴 수 있는 인간의 모든 즐거움은 뒤로 밀리고 CCTV 너머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있는 신의 시선만 의식하며 온갖 의무에 짓눌려 살게 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이란 무엇인가? 아하스 페르츠는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영원하다는 것은 결국 무의미와 별로 다른 바 없소. 모든 것은 순간이고 영원한 행복이란 영원한 불행처럼 존재하지 않소.
완벽한 행복을 영원히 누리는 삶이 지속된다면 그것이 과연 행복일까? 라는 의문이다. 이세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 아름다움이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기 때문이고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이 소중한 이유는 그 즐거움에는 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하스 페르츠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과 삶과 세상을 긍정하는 ‘사람’ 의 목소리를 듣는다. 교리화된 ‘신’ 의 목소리와 대비하여 ‘사람’ 의 목소리는 인간적이고 친근하다.
6. ‘사람의 아들’ 과 ‘사람의 아들’ 의 흥미진진한 대결
소설의 백미는 사실은 신이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온 ‘사람의 아들’ 예수와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의 아들’ 인 인간 아하스 페르츠의 팽팽한 대결이다. 즉, 신과 인간의 대결인 것이다. 아하스 페르츠는 어디까지나 ‘인간’ 의 입장에서 ‘인간’을 대변하며 신의 독선적인 논리에 저항한다. 인간을 철저하게 신을 찬양하기 위한 ‘도구’ 이자 ‘수단’ 으로 보는 기독교의 ‘신중심적인’ 독선적 교리에 지친 독자들에게 시원한 통쾌함을 선사한다.
자신의 행적 하나하나를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며 인간의 입장에서 교리의 맹점을 파고드는 아하스 페르츠를 인내심을 갖고 상대하던 예수는 결국 화를 감추지 못하고 그를 ‘사탄의 아들’ 이라고 칭한다.
“이제 확실하게 기억해 냈소. 당신이 누구인지를. 당신의 말은 바로 하늘에서 내 아버지를 괴롭히던 사탄의 주장 그대로요. 당신은 분명 그의 아들이오.”
“무엇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 이름으로 욕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사람의 아들이오. 나는 당신처럼 부모와 형제를 부인한 적도 없고, 찬상의 기억도, 맹물을 포도주로 만들 권능도 가지지 않았소. 나는 오직 사람으로 말했을 뿐이오.”
소설 속 소설은 끝까지 아하스 페르츠와 예수의 대결로 일관된다. 아하스 페르츠는 배반자 ‘유다’ 를 이용하여 예수를 체포하고 죽음으로까지 몰아붙인다. 재미있는 것은 후대에 배반자로 악명 높은 ‘유다’ 가 소설 속에서는 매우 매력적인 인물로 형상화되어있다는 점이다. 성경에서는 그를 ‘도적’ 이라 규정하고 은 삼십에 눈이 멀어 스승을 판 인물로 형상화하지만 소설에서는 그를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로 치면 ‘항일 무장단체’ 쯤 될법한 ‘열심당원’의 열렬한 애국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하층민의 지지 기반을 붕괴시킬 위기를 만든 예수를 향한 그의 증오는 매우 합당하게 느껴지며, 예수가 예언 속 메시아인 것을 알아차리면서도 배반자의 길을 가는 그는 소설 속 어떤 인물보다도 가장 현실적이고 신념에 충실하며 자기 희생적으로 보인다. 그런 유다가 신의 아들 예수가 아닌 사람의 아들 아하스 페르츠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끝까지 ‘기독교의 신’ 을 부정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와 아하스 페르츠의 대결은 결국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승리처럼 보인다. 십자가의 예수 앞에서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기로 했다’ 고 말하는 아하스 페르츠의 모습은 어쩔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앞에서 공허해 보인다. 소설 속에는 묘사되지 않지만 예수를 배신한 유다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기독교의 신’ 을 부정하고 새로운 신을 만들기까지 한, 유다의 후예라 할 수 있는 민요섭 역시 결국에는 십자가 아래로 되돌아가려는 선택을 하여 소설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거대하고 견고한 기독교의 교리를 전복시키는 것이 그만큼 어려움을, 나약한 인간이 ‘무신론’ 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음을 말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신에게 의존하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내세를 구걸하지도 않는, 대지에 단단히 뿌리내린 사람의 아들이 되는 것이 쉽지 않은 길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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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07.07
  • 저작시기20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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