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장로교회 분열과 에큐메니즘(ecume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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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59년 장로교회 분열과 에큐메니즘(ecumenism)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머리말

II. 분열의 과정과 동력
 1. 분열의 제원인
 2. 3천만 환 사건
 3. NAE 측의 박형룡 비호
 4. 분열의 동력으로서의 반공 이데올로기
 5. 일사부재리 원칙의 위배

III. 맺음말

본문내용

정회로 마무리했다. 양낙홍, “1959년 한국 장로교의 분열 과정”, 152.
이에 대해 양낙홍은 비판하기를, “NAE 측에 속했던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당파를 초월한 사회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책임감보다 계파적 소속감에 의해 더 많이 지배당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위의 논문, 152.
노진현 목사가 일사부재리의 원칙 하에서 이미 전날 확정된 사항에 대해 결정을 뒤집어 보려는 NAE 측을 제지하기는 커녕 오히려 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연석 회의를 제안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총회는 NCC 측과 이들 총대들은 총회를 마친 바로 그날 밤 서울 연동교회에서 따로 총회를 열었기 때문에 연동측이라 불린다. 이에 대해 양낙홍은, NCC 측이 너무 경솔하고 성급한 반응을 했고, 이에 더하여 미국 남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파송 교회가 WCC의 회원이었기 때문에 연동측만을 유일한 합법적 총회로 인정한다는 성명서로 말미암아 이들의 분열은 더욱 공고화되었다고 평가한다. 위의 논문, 156.
NAE 측, 즉 이들 NAE 측 총대들은 총회장 노진현 목사의 제안을 따라 11월에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여 그동안 문제되었던 WCC를 탈퇴하기로 가결하였으며 소위 승동측으로 불린다.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되었고 총회가 나뉘자 학교도 분열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통합, 합동의 분열은 분열의 명목을 정당화시킬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III. 맺음말
해방과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어지럽고 혼란한 당시 한국 상황에서 기독교는 미국과 기독교 정권을 등에 업고 지배적 종교로서, 특권적 사회 계층으로서, 냉전적 반공주의로, 친미적 성향으로, 분단 체제에 공고히 편입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와 비슷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일종의 심판으로 한국교회는 50년대에 세 차례나 걸쳐 찢어지고 분열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분열의 배후에는 언제나 박형룡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양낙홍은 박형룡의 신학이 보수 신학의 지도자 메이첸의 영향을 받아 보수성을 띤 것으로 약술하고 있는데 장동민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형룡이 수학할 당시의 프린스턴의 학풍은 ‘19세기 복음주의’와는 다르게 과학적, 철학적 증거를 통해 성경의 무오성을 변증하려 했으며 성경의 고등 비평에 대해서도 이성에 의한 주석 작업이 결코 성경의 신성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유연성을 보였으며 메이첸과 당시의 박형룡 역시 ‘19세기 복음주의’적 태도보다는 훨씬 유연한 태도를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장동민, “1930~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에서의 소위 ”자유주의“ 해석의 문제,”「한국기독교와 역사」6(1997), 199-202. 차후 박형룡의 학위 논문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즉, 교권주의에 빠진 한 개인의 일관적이지 않은 신학과 태도는 분열의 핵심적 요인이 되고 말았다.
1959년 통합, 합동의 분열의 연장선으로 2013년 WCC의 제 10차 총회의 부산 개최에 대한 반응 역시 크게 양분되어 있는데 2010년 7월 12-13일 합동 총회 신학부는 제1회 개혁주의 신학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권성수 목사(대구 동신교회)는 “WCC 신학은 기독교 진리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하면서 해방신학과 종교다원주의를 WCC 신학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았다. 그는 “WCC가 연합 봉사 선교와 갱신을 주장하고 있지만 결국은 다 덮어서 하나가 되자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하였고, 따라서 WCC 안에 들어가서 신학의 문제점을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덮어놓고 하나가 된다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WCC 신학은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2013년 WCC 제10차 부산 총회에 대해서는 “WCC에 가입하지 않은 교단들과 연합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면서 동시에 “WCC가 어떤 단체이며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는지를 널리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WCC 총회의 한국 개최를 앞둔 이 시점에서 다시 연합할 동력을 얻기 위해서 50년대 당시 분열의 동력, 또는 연합의 반-동력을 살펴본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시대적 정황 속에서 교회가 시대적 요구를 살피고 그 흐름을 바꿀 것이냐, 아니면 시대에 편승해 그 흐름 속에 매몰될 것이냐 하는 과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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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1.11
  • 저작시기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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