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연구 주요 저작] - 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 1945~1961 (3장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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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연구 주요 저작] - 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 1945~1961 (3장 4장)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확립하는 과제였고, 농업집단화와 동시에 사회주의적 개조의 일정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개인상공업자를 협동경리에 편입시키거나 노동자, 사무원으로 개조하는 정책이 취해지고, 양곡수매사업 개시와 함께 양곡상을 금지했듯이,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소농경리와 소상품생산 및 유통과의 관계를 차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다. 양곡수매사업으로 곡물 판매루트를 국가가 완전히 장악하고 개인 상공업자의 영업의 자유를 박탈하며 생산협동조합에 가입시켰다. 이 작업은 평양 등 개인상공업이 발달해 개인농과 밀접한 경제적 연관이 있는 지방에서 효과를 올려 이 지방에서의 농업집단화도 급속히 진행되었다. 1958년 사회주의적 개조가 거의 완료되었다.
Ⅲ.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의문점
1. 조중연합사령부의 존재
625전쟁 중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한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조중연합사령부의 결성 과정은 처음 알았다. 1950년 10월 2일 유엔군의 참전으로 북조선 체제가 거의 존망의 위기에 몰려 있었고 중국군의 참전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10월 8일 중국이 참전을 결정하여 전쟁이 내전에서 미중전쟁으로 전환되었다. 김일성은 중국군이 참전해도 군통수권은 북조선 지도부가 장악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중국의 참전 규모가 수십만이 될 것이었고,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 경 정치위원 펑떠화이는 북조선 측에 작전지휘를 맡기기를 원하지 않았다. 북조선군의 지휘체계가 매우 조잡하며 장기적 전략이 없고 모험적 성향이 강하다고 평가했다. 펑떠화이는 인민지원군 사령부에 조선인 동지를 원해 박일우를 부사령원으로 두었다.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기 위해 직접 참전하는 것을 피했고, 중국은 중국이 정(正)이 되고 북조선이 부(副)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중국과 북조선의 갈등이 있었다. 소련의 중재로 결국 조중연합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북조선의 사회주의 개조가 완료된 1958년 10월까지 북조선에 주둔하였다.
2. 김일성을 교체하려 한 시도
1956년 8월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반대파가 반격을 시도했다. 김일성의 소련,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 순방 중 반대파가 김일성의 개인숭배 등을 비판하였으며, 김일성 귀국 후 중국의 도움으로 반대파 중 4명인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강이 중국으로 망명을 했다. 망명한 4명을 통해 김일성 개인 숭배 등 평양에서 벌어진 사태가 중국에 알려졌고, 마오쩌뚱이 이 사태에 적극적 개입을 주장해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회에 참가하고자 소련에서 대표로 온 미코얀과 상의해 평양에서 발생한 사건을 조사하고 필요하다면 김일성보다 적당한 인물로 바꾸기 위해 공동대표단을 파견하자고 제안했다. 흐루시초프도 김일성을 축출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코얀과 펑떠화이가 직접 북조선으로 향했다. 그러나 김일성 세력이 압도적으로 강하게 당중앙위원회를 완전히 장학하고 있어 대표단은 김일성 축출 계획을 단념했다. 미국과 소련이 북조선의 수장을 바꾸고자 했던 것도 놀랍고 이들의 입김으로 반대파의 주도자들이 복권되었다는 것도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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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8
  • 저작시기2019.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83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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