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연구주요저작강독 -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 1945 ~ 1961 (34장) - 김일성 단독체제 남조선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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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연구주요저작강독 -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 1945 ~ 1961 (34장) - 김일성 단독체제 남조선혁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강독한 저작의 주요 내용 및 논지 요약
(1) 제3장 6.25 전쟁과 전시체제(1950~1953)
(2) 제4장 전후 경제복구건설과 사회주의적 개조(1953~1958)

2. 본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 및 그 이유

3. 강독내용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이해되지 않는 내용, 의문점

본문내용

조선에 자신이 예상한 규모의 유격부대가 존재하며 지하세력이 전쟁 발발과 동시에 봉기할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였을 때, 그 근거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었을지는 고려해 볼 요지가 있으나 본인이 전쟁을 통한 권력의 쟁취를 노력다고 한다면 본인은 그 사실을 일방적으로 신뢰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남한 내부에 있는 빨치산 세력의 와해는 결정적으로 박헌영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사라지게 되는 결정적 근거가 된 것이었다. 이것은 김일성의 최대 라이벌 제거와 함께 이후 유일사상체계로 가는 중요한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2) 8월 전원회의를 통한 반대파의 반격은 북조선 내에서 일어난 최후의 가장 강력했던 투쟁이었다. 그러나 반대파의 실패는 결국 연안계와 소련계의 숙청을 낳았고 특히 군내에서는 더욱 철저한 숙청이 이루어져 당과 군의 단일지도체제가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당과 군에 ‘주체’의 바탕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소련과 중국에 대한 ‘주체’를 추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주체사상이 철학적인 토대를 통해 대외에 공표되기 위한 밑바탕이 되었다.
3) 전쟁 발발까지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협력관계를 이뤄내야 했다. 아마도 해방 이후 가장 강력한 협력관계가 되었고 전쟁 직후 또다시 반목과 갈등의 관계가 되었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박헌영과 김일성의 동상이몽을 추측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박헌영은 북조선 내의 김일성 단독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마지막 기회로 전쟁을 염두해 두었을 것이다. 전쟁을 통해 본인이 주장한 남조선 내 공산당의 봉기와 유격대의 활동을 바탕으로 남조선혁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해방 직후부터 2년여간 이뤄졌던 박헌영 주도의 공산주의운동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박헌영이라는 존재를 전쟁 책임에 대한 자신의 가리막으로 활용하고자 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전쟁에 개입시킨 뒤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단독으로 감당하게 된다면 당시 북조선 내 2인자였던 박헌영이 자신의 대체자로 대두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었을 것이다. 두사람의 동상이몽은 무력통일의 실패를 통해 확연하게 드러났다.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 반드시 짊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김일성은 박헌영이라는 좋은 방패를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권력장악과 권력방어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던 동상이몽은 전쟁 실패로 인해 김일성의 성공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4) 전후 북조선 내 동질화라는 결과는 북조선의 향후 강력한 경찰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남한에서 60년대 극렬한 민중봉기가 일어났던 것은 강력한 독재체제 속에서도 남과 북의 다양한 세력들이 공존하였고 옳고 그름에 대한 토론과 주장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후 북조선은 호흡조차 힘들만큼 강력한 탄압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북조선 체제에 ‘순종적인’ 세력들이 남았기 때문이다. 현재 북조선을 두고 왜 누구도 봉기를 일으키지 않는가 묻는다면 여러 가지 이유 중에 한가지로, ‘태생적인 동질성’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만큼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3. 강독내용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이해되지 않는 내용, 의문점 등
1) 연안파와 소련계는 왜 연합하지 않았는가? 남로계의 숙청에는 소련계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남로계가 숙청되는 과정을 보면 분명 김일성의 독재적 야심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다 강력한 견제세력이 되기 위해 연안파와 소련계, 그리고 몰락한 남로계까지 연합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가능한 시나리오 아닐까? 실제 연합한 사실이 있음에도 언론을 통해 언급된 사실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연합하려고 했던 시도조차 없었던 것인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2) 남로당계가 숙청된 이후에 남로계 당농민부부장 박경수가 임명되어 1954년 11월 농림부상까지 되었다. 그가 전농 창설을 주도하고 선전부 책임자였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나 주요한 보직에 남로계 인사가 진입한 것은 숙청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을지 의문을 품게 된다. 남로계 인사 중 살아남은 자들은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연구해 보고 싶다.
3) 허가이가 창설했다고 하는 제1, 2, 3 비서직은 현재 김정은이 가지고 잇는 직책인 제1비서직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 궁금하다. 같은 노동당 내 제1비서라는 직함이지만 그 권한에 대한 차이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정확한 차이점을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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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9
  • 저작시기2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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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83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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