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톺아보기 - 논쟁으로 보낸 10년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존 웨슬리 톺아보기 - 논쟁으로 보낸 10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촉구하였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주신 은총의 자유와 두려움으로 이끄는 노예의 영이 아니라 신생 안에서 시작되고 예시된 거룩함을 향유하라고 촉구하였다.
〔Personal Comment〕
* 기독교 역사를 보면 신학적 충돌과 마찰은 건강한 신학을 탄생시켰다. 오늘날 우리의 신학도 점진적으로 사유하며 구도하며 발전시켜야 한다고 느꼈다. 웨슬리와 칼뱅주의자들의 충돌은 오늘날의 건강한 신학의 구도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도 이러한 신학적 사유과 구도자적 고찰을 날마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갈증은 내일의 해갈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한다.
8. 칼뱅주의자들과의 아쉬운 결말
칼뱅주의자의 논쟁에 대한 비판은 두 방향으로 흘러갔다. 1770년 연회록은 칼뱅주의에 대한 명시적 비판을 담고 있었다. 1739년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출판하고.1740년 페터래인 신도회 앞에서 또 1744년 옥스퍼드 대학 앞에서 했던 것처럼 웨슬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한 신학적 문제들과 관련하여 1770년 연회록을 출판함으로써 뜨거운 논쟁이 일어나기를 희망하였다.
웨슬리와 플레처는 칼뱅주의가 때때로 율법폐기론을 조장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상하게도 개혁교회 신학의 가르침은 거룩하게 되는 것의 의미를 간과할 수 있다고 보았다.
1773년 웨슬리는 우드하우스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펀지를 썼다. “나는 레이디 헌팅던을 따르는 설교자들이 가는 곳마다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음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 끔찍스런 예정론 교리에 완전히 빠져서 다른 것에 대해서는 설교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 년 후 웨슬리는 하나님은 칭의를 받은 신자들을 그들의 마음의 성정과 행위에 따라 기뻐하기도 하고 기뻐하지 않기도 한다고 플레처에게 편지를 썼다. 웨슬리는 “그러나 저들은 이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내적인 거룩함과 외적인 거룩함의 기초를 무너뜨리고 있고, 점점 더 ‘우리와 그들 사이에 큰 거리가 있음’을 분명하게 보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1777년 프랜시스 올프에게 진지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칼뱅주의를 조심히십시오. 칼뱅주의의 성향을 가진 것이라면 작은 것이라도 조심하십시오.”
1778년 메리 비숍에게 보낸 편지에서 웨슬리는 칼뱅주의자 “복음” 설교자들의 사역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구원의 핵심을 제시하였다. “감각이나 은총도 없이 오만하고 자기만족에 빠진 동물이 그리스도, 그분의 피, 혹은 믿음에 의한 칭의를 토해내자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이 어찌나 훌륭한 설교인고! 하고 화답합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감리교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그런 식으로 배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없이는 어떤 복음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칼뱅주의 신학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은 구원이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섭리를 통해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깨닫게 될 때 신자들이 경험하고 받게 되는 위로이다. 선택된 자들은 진정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잃어버릴 수도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은총 안에서 자라가며 점차 거룩하게 된다는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확신 교리는 부분적으로는 칼뱅주의의 예정과 선택 교리가 제공할 수 있는 위로에 대한 답이었다.
예를 들면 1771년 웨슬리는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진 완전한 확신과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은 최초의 확신을 구분하였다. 웨슬리는 종의 믿음과 그 받아들임에 대해 더욱 크게 인정하였다. 복음의 약속에 대한 무지나 봄이 허락하지 않아 확산이 부족하지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예외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가 생애 말년에 칼뱅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발전시킨 주제는 확신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동일시한 것 이었다.
1778년 웨슬리는 “보편적 구원에 대한 발췌 글들과 원 논문들\"을 실었던 「아르미니안 매거진」 첫 호를 출판함으로써 칼뱅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칼뱅주의자들의 「복음 잡지」에 대한 웨슬리의 대답으로서 「아르미니안 매거진」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모든 죄로부터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가장 놀라운 길들을 제시하였다. 이보다 몇 년 앞서 웨슬리는 “모든 죄로부터의 구원을 설교하고 지금 순전한 믿음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을 기대하라고 격려하는 일이 칼뱅주의의 전염병을 가장 효과적으로 멈출 수 있습니다”라고 기술하였다.
1770년 말 칼뱅주의자들과의 논쟁이 시들해진 것은 양쪽이 어떤 동의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라 논쟁에 서로가 지쳤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런던에서의 웨슬리의 목회가 번성하게 되었고 이로써 감리교도들의 터전이었던 파운더리를 대신한 새 건물을 짓는 데 힘을 쏟았다. 웨슬리 채플, “뉴 채플, “시티로드 채플”로 알려진 새 건물은 이전 파운더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수잔나 웨슬리가 묻혀 있는 번힐 필즈 맞은편에 세워졌다.
1777년 4월 21일 채플의 주춧돌을 놓는 축하예배를 드렸고 1778년 11월 1일 웨슬리의 인도로 건물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입주예배를 드렸다. 채플의 설교에 대해서 웨슬리는 자신의 일지에 “채플은 훌륭하지는 않지만 완벽하게 아담합니다” 라고 기록해 놓았다.
말하자면 감리교도들에게 잘 어울리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거룩한 사랑을 강조하는 감리교회의 특성이 세대를 두고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제도가 필요함을 절감하였다. 이 과제는 1770년 말과 1780년대 더욱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였다. 웨슬리는 그렇지 않겠노라고 스스로 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국교회의 제도적 경계를 넘는 결정을 하곤 하였다. 결국 찰스 웨슬 리가 염려하였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Personal Comment〕
* 칼뱅주의자들과의 10년간의 논쟁을 통해 웨슬리는 좀 더 건강한 감리교적 정신을 정의화시킨 것 같다. 웨슬리 자신도 신학을 재정립하는 기간이었고 감리교의 원석과 같은 신학적 기반을 살펴볼 수 있었다. 가장 맘에 들었던 그의 말은 “채플은 훌륭하지는 않지만 완벽하게 아담합니다” 이다. 오늘날 현대교회의 거대화, 기업화된 교회가 해야 할, 지켜야할, 들어야할 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가격1,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19.08.05
  • 저작시기2019.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10789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