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동남산 지역 유적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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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주 동남산 지역 유적답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감실여래좌상
2. 탑골 마애조상군(磨崖造像群)
3. 미륵골 보리사
4. 서출지
5. 남산리 쌍탑
6. 염불사지
7. 칠불암의 사방불
8. 망덕사지(望德寺址)
9. 사천왕사지

본문내용

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明郞法師)에게 당나라의 침입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명랑법사가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밀교의 문두루비법을 쓰도록 권유하였다. 그런데 당나라의 침입이 급박하여 절을 완공할 시간이 없어 색이 있는 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을 묶어 오방신상을 만든 다음 12명의 유가명승들에게 비법을 쓰도록 하였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군대의 배가 침몰되었다고 한다. 그뒤 정식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여 5년 만에 완공하여 사천왕사라 이름하고 성전(成典)을 두어 관리하였다.
가람은 금당지의 앞에 동서로 목탑을 세웠으며 금당의 북쪽 좌우 목탑과 대응되는 곳에는 경루를 두었다. 금당지는 초석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초석에 의하면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이며 건물지의 중간부분에 불좌대의 지대석으로 추정되는 장대석이 남아 있다. 동탑지는 130㎝ 내외의 높이로 토단이 남아 있으며 사방 3칸으로 초석이 남아 있다. 탑지의 중앙에는 118㎝ 내외 크기의 심초석이 남아 있는데 사리공이 있다. 서탑지는 동탑지와 동일한 형태로 심초석의 사리공도 같은 크기이다. 탑지의 앞에 중문, 금당지의 북쪽에는 강당지가 있고 이들 건물을 둘러싸는 회랑터가 있다.
탑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사천왕상이 부조된 전은 일부가 복원되었는데 녹유전이다. 복원한 바에 의하면 천왕들은 각기 2마리씩의 악귀를 깔고 앉은 생령좌이며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본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알 수 있는 동방지국천왕은 보관을 쓰고 왼손에 장도를 들고 있으며 남방증장천왕으로 추정되는 천왕상은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 활과 화살을 잡고 있다. 이 사천왕상에 대해서 선덕여왕대에 활약하였던 승려 조각가인 양지(良志)가 만들었다는 팔부중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절에는 경덕왕대에 도솔가, 산화가 등의 향가를 짓고 피리를 잘 불어 달이 가기를 멈출 정도였다고 전하는 월명대사가 있었다.
* 사천왕사터 목탑터 기단부 추정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사천왕사터를 발굴조사하고 있는데, 회랑터와 함께 조사한 서쪽 목탑터는 발굴 결과 고대 신라 예술의 숱한 비밀을 풀어줄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겨우 남은 서쪽 계단 아래 전돌(벽돌) 벽체를 통해 전혀 몰랐던 고대 한반도 목탑의 기본 구조가 밝혀졌다.
수백년 전 허물어진 뒤 흙에 덮여 언덕 모양으로 변한 사방 12.4m의 정사각형 탑 기단부는 놀랍게도 그냥 돌로 쌓지 않고 당초무늬가 새겨진 전돌 수백 개를 자연석 기둥 사이의 공간에 채워 넣어 사방을 둘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게다가 전돌은 동서남북에서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천왕상(혹은 팔부신중)이 새겨진 전돌과 맞붙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런데 사천왕상이 목탑 기단부 각 벽면마다 4구씩 안치됐음이 드러났는데, 이렇게 되면 사천왕사 서탑만 해도 모두 16구에 이르는 사천왕상이 있었던 셈이 된다.
*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채유사천왕상전(彩釉四天王像塼)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는 경주 낭산(狼山) 서쪽 기슭에 호국 사찰로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는 이 사천왕사터에서 부조틀로 찍어내어 표면에 갈색의 유약을 입힌 후 구운 사천왕상(혹은 팔부신중)이 새겨진 전(塼)돌이 출토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 이 전돌에 새겨져 있는 사천왕상은 전체적으로 반부조(半浮彫)이지만 얼굴, 가슴, 손, 무릎 등은 고부조(高浮彫)로 하여 강조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사천왕상이 악귀를 밟고 서 있는데 반하여 이 사천왕상은 악귀를 깔고 앉은 좌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사천왕상>
이 사천왕상을 조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은 신라시대 뛰어난 조각가 양지(良志)스님이다. 양지스님은 생몰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선덕왕 때 자취를 나타냈다는 기록과 사천왕사의 사천왕상 등의 작품으로 볼 때 삼국통일 전후에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천왕상만 보아도 양지스님은 비록 신분은 스님이었지만 대단한 예술 조각가였음을 알 수 있는데, 양지스님에 대해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양지스님은 신기하고 괴이하여 다른 사람이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많았고, 잡다한 기예에도 두루 통달하여 그 신묘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양지는 또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영묘사의 장륙존상과 천왕상,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사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장, 그리고 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또한 영묘사와 법림사 두 절의 현판을 썼으며,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이와 함께 3천 개의 불상을 만들어 그 탑을 절 가운데 모시고 공경했다.」
<사천왕사터에서 1936년 출토된 하반신과 2006년에 출토된 상반신을 결합한 녹유신장상>
황룡사터 목탑의 경우 13세기 몽고 침입 때 깡그리 불타버려 기단 구조 등이 명확히 드러난 바 없고, 국내 고대 목탑 모형을 받아들인 7세기 일본 나라시대의 고찰인 호류지나 야쿠시지도 기단부는 자연석으로 채운 데 불과하므로, 사천왕사 목탑을 신라 장인들이 얼마나 공들여 독창적으로 쌓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논쟁거리 하나는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사천왕상전에 악귀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새겨진 신상이 정말 사천왕상이냐 하는 것이다. 신라인들이 당과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불국토를 수호하는 사천왕 신앙을 들여와 절을 지었을 것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으나, 이 문제를 놓고서는 사천왕상설((四天王像說, 강우방 이대교수)과 사천왕의 여덟 하급신인 팔부신중설(八部神衆說, 문명대 동국대교수)로 엇갈려 있다. 보통 다른 탑에서는 사방에 한 개씩만 조각하는 사천왕상이 유독 이 목탑터에서는 같은 조각상 파편들이 여러 개 나오고 있다는 점도 의문을 부추기고 있다.
강우방은 악귀를 밟은 특유의 형상과 사천왕사의 신앙 성격에 비춰 한 면마다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사천왕상전을 붙였다고 본 반면에, 문명대는 양지 스님이 천왕사(사천왕사)의 탑 하단에 팔부신중을 조각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은 사천왕상 조각을 여럿 만든 전례가 다른 탑에 없다는 점을 들어 이를 반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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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8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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