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의 등장과 국보위(1980-1984)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제 1절 국보위체제의 형성 및 성격
1) 유신체제의 생성과 특징
2) 유신체제의 종말
2. 국보위체제의 성립 및 성격
1) 신군부의 정치개입
2) 전두환의 등장과 최대동원전략
3) 12.12사태와 검찰의 수사 발표
4) 전두환의 실권장악
5) K 공작과 5.17과 광주민주화투쟁
6) 정치권의 분열과 1980년 `서울의 봄`
7) 국보위 입법회의 새 헌법

본문내용

들이며, 이들외에 김진영과 고명승 등 9명을 가리켜 5공의 "7공자" 또는 "개국공신"이라는 최상의 호칭으로 불리어졌다.
이들은 정권탈취를 위해서는 어떠한 뜨거운 대가도 지불할 수 있는 무리수를 가지고 있었다. 80년 5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의 확대실시로 부터 5월27일 까지 10일간의 광주사태가 그 증명서이다.
K 공작은 두가지 측면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3김씨를 민주정치세력으로하고, 신군부를 안정구축세력으로 차별화시켜 [先安定 이론]을 확산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론계 간부들의 성향분석을 통해 협조 가능한 인사들을 포섭하여 군부정권의 보호막으로 삼으려는 활동이었다. 한편 그들은 연일 계속되는 학원데모와 노사분규를 부추겨 혼랁족으로 몰아붙이는 여론조작을 강화해 나가면서 3김씨의 대결양상을 [대통령병에 사로잡힌 추악한 파벌싸움]으로 비쳐지도록 언론 검열단을 통해 언론노조를 이용하였다.
17.18일의 주말과 19일 월요일을 전후로 수습이냐 아니냐의 갈림길에 놓였다는 신문들의 논평과는 달리 호남고속도로에서는 공수부대 병력을 싣고 광주지방으로 이동하는 군용차량 행렬이 목격되었고 17일 오후 전남대 학생회 사무실에는 서울로부터 한 여학생의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는 "서울의 각 대학 학생회장단들이 모두 계엄당국에 연행되어 갔다"는 소식이었다. 마침내 우려했던 상황이 광주에서도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시내 곳곳에서 민주화 운동의 학생 및 인사들이 검거되었고, 그후 10일간은 기억하기도 참담한 상황이 벌어졌다.
6) 政治圈의 分裂과 1980년 "서울의 봄"
1968년 3월 체코의 Dubcek는 Breznev.Ulbricht.Gomulka 등에게 민주화의 필요성을 납득시키고자 노력했고, 동구권 지도자들과 갈등없이 지지를 받으며 체코에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실현코자 했다. 4월 10일에는 Eurocommunism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기록으로 손 꼽히는 "체코 공산당의 행동강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전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은 "프라하의 봄"에 대해 찬.반의 논쟁은 있었으나 Eurocommunism에 속하는 정당들은 "프라하의 봄"을 지지하고 자신들의 길을 위한 본보기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동년 8월 21일 소련군대에 의해서 "프라하의 봄"의 꿈은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유신체제에서 탄압받던 인사들의 발언권이 높아지고, 근로자들의 [사북사태]를 비롯한 격렬한 단체행동, 대학생들의 민주화요구를 위한 끝없는 시위 등으로 정국은 뜨겁게 달아 올랐으나, 한편 정치권은 4월 7일 김대중이 신민당입당을 포기한후 김영삼과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공화당의 김종필총재는 양김의 임시국회의 즉각소집과 계엄해제의 요구에 미온적인 자세를 취하다가 5월 20일 이후에나 국회를 소집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신군부가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즉 신군부는 이를 好機로 삼아 [비상조치]의 내용에 마지막 손질을 하면서 여론조작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다음 정권은 내것이라고 同床異夢에 빠진 3金씨들은 신군부의 실권장악의 사태와 권력내부의 큰 흐름에 신속히 대처하지못하고 200여일만의 짧은 "서울의 봄"은 5.17에 의해 첫번째 3金시대는 암흑과 탄압의 시대로 사라졌다. "프라하의 봄"은 외세에 의해 물거품이 되었으나 "서울의 봄"은 민주화의 여망을 묵살한 정치군부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고, 그대신 군사통치는 계속 되었다.
[10.26]직후부터 군부에서는 공공연하게 {3金불가론}이 제기되고 있었으나, 언론이 완전히 군부의 통제하에 들어간 상황에서 국민들은 權府내의 움직임을 알 수가 없었고, 국민들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사실상 군부의 집권을 뜻하는 [3김불가론]은 당시의 군핵심 인사들의 일치된 의견이었고, [3김불가론]을 누구보다 강력히 주장한 사람은 전두환사령관이었다. 당시 정치권 인사로서 전사령관으로부터 [3김불가론]을 직접 들은 사람은 전두환과 이순자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던 최영희 유정회의장이었다. 최의장은 [안개정국]속에 視界를 전혀 분간할 수 없는 80년 1월하순쯤 JP를 밀도록 설득하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 JP옹호론을 펴는데, [부패 비리등 흠이 많아요. JP뿐 아니라 3金씨 모두 안됩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7) 國保委 立法會議 새 憲法
이러한 상황하에 신설된 [국보위]는 안보체제의 强化, 經濟難局의 타개, 政治發展내용의 충실, 社會惡일소 등의 國家規律의 확립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민주세력의 탄압과 공포정치를 이용한 정계개편을 통해 새로운 法的 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하는 등 支配機構를 수립하는데 주력하였다. 한편 [국보위 立法會議]는 全斗煥정권의 法的 제도적 근거를 만들었다. 국보위는 유신헌법의 非立憲的 성격과 大統領 1인에의 권력집중을 답습한 제2의 유신헌법을 만들어 국민의 정치적 욕구를 차단하고 批判세력의 활동을 탄압하는 반민주적 관료적 권위주의체제를 고수하였다.
全斗煥정권의 공식적인 출범은 81년 2월 25일 7년의 單任 임기를 시작으로 동년 3월 3일 취임하면서 公式的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10.26이후 국가위기의 상황을 극복하려는 정치적 개혁분위기 속에서 싹트기 시작하여 80년 8월16일 최규하대통령이 하야하자, 21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기로 건의하여 27일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0월 27일 새헌법을 공포 실시하면서 기존정당과 국회를 해산하고 국회기능을 입법회의가 대행하였다. 그러나 81년 2월 25일 대통령선거인단선거에서 전두환은 단독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전두환은 80년9월1일 11대 大統領就任式辭에서 80년대에는 舊時代의 잔재를 추방하고 國政指標로 자유민주주의의 토착화, 福祉國家의 건설, 正義社會의 구현, 교육혁신 및 문화창달 등 4대 지표를 제시하였고, 새헌법에 따른 81년 3월 3일의 就任式에서 그 자신이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것이며] 또한 [7년의 단임임기를 통한 平和的 政權交替의 전통을 확립할 것]임을 강조하고 [전쟁의 위협.빈곤.정치적 탄압과 권력남용] 등의 3대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키워드

  • 가격2,3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1.10.27
  • 저작시기2001.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025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