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정치체제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2. 정치
1) 정치이념
2) 정치체제
3) 정치권력
4) 외교
(1) 외교정책
(2) 외교활동

본문내용

~80)을 체결하였고 불가리아와는 10년간의 경제 및 과학기술협조의정서(1976~85)를 조인하였으며, 유고슬라비아와는 상호경제협동위원회 설치에 합의하였다.
특히 1984년 5월 김일성은 소련 방문을 마친 뒤 곧이어 폴란드·동독·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 등 동유럽 7개국을 순방하고 동독 및 불가리아와 우호 및 협력조약을 각각 체결한 것을 비롯하여, 여타 국가와도 경제·과학·기술협조강화에 합의하였다. 김일성의 동유럽 순방을 계기로 정치면에서는 3자회담 지지확보 등으로 동유럽국가와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고 경제면에서는 당면한 경제난을 타개하고 경제계획 달성을 위해 사회주의권 중에서 경제사정이 나은 동독·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 등의 동유럽국가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는 데에 중점을 두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개혁과 민주화가 추진되고 1989년 2월 헝가리를 선두로 하여 1990년 이후에는 모든 동유럽권 국가들과 한국이 수교를 정상화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북한이 그 동안 누려온 독점적 외교무대는 사라지게 되었다.
북한의 제3세계 외교는 반제반미공동전선 형성과 북한통일방안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는 데 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북한은 제3세계국가들에 대하여 ① 평화공조노선 표방, ② 반제·반식민주의 및 민족해방투쟁지원 선전, ③ 국제공산주의 선전기구 가입, ④ 인민외교, ⑤ 문화 및 경제교류 등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북한은 1961년 9월 노동당 제4차대회 직후 제2차 반둥회의를 앞두고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 고위대표단을 파견하여 이 지역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였다.
1966년부터는 아시아·아프리카·중동지역의 친소적인 국가들을 대상으로 친선사절단을 파견하기 시작하였으며, 1964년 11월 나세르 통일아랍공화국 대통령을 초청한 이후부터는 각국의 수뇌급 인사들을 대거 초청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이 이처럼 제3세계 국가들과의 관계강화에 주력한 것은 이들 국가의 대부분이 비동맹회의의 구성국가들이기 때문이며, 한반도문제가 UN에 상정될 때 비동맹회의 국가들과 국제통일전선을 형성함으로써 UN대책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북한은 1975년 8월 리마에서 열린 비동맹외상회의에서 회원국으로 가입한 이래 비동맹회의에 지속적으로 한반도문제를 상정하며 북한정책에 대한 지지를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1980년에 들어오면서 비동맹회의 회원국간에 노선분규가 생기자 북한은 비동맹국가들의 ‘통일단결과 경제협력 및 자주성’을 촉구하면서 투쟁의 방향을 반제자주화로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비동맹국가들이 대결보다는 협조를, 이념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한국의 국제적 지위가 대폭 향상됨에 따라 비동맹회의에서 한반도문제에 대한 북한의 주장은 점차 설득력을 상실하였다. 1989년 9월 유고슬라비아에서 개최된 제9차 비동맹정상회의에서는 한반도문제 결의안 초안에 대해 수정안조차 제출할 수 없었고, 1992년 9월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된 제10차 비동맹정상회의에서도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북한이 대서방 외교를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접어들어 닉슨 미국대통령의 중국방문, 미·소화해 등 동서화해 분위기가 형성되면서부터이다. 북한은 이와 같은 국제정세의 흐름에 자극되어 71년 11월 노동당 제5기 3차전원회의에서 대(對)서방 접근을 정당화하는 ‘당면한 제문제의 전술적 전환’을 결의하였다. 북한의 대서방 외교방식은 민간 수준의 민간외교방식과 정권 차원의 외교적 접근을 병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즉 대상국가의 저명인사나 사회단체를 개별적으로 초청하거나 민간무역대표부와 공보관 등을 설치하여 준정부차원으로 끌어올렸다가 공식적인 외교수립으로 발전시켜 가는 방식을 도모하여 왔다.
최근의 대서방외교의 제1차적 비중은 대미, 대일 관계개선에 있다. 이는 북한이 한국의 중국·러시아와의 수교에 대항하면서 미·일 두 나라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고, 서방선진국에 접근하는 발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북한은 70년대 중반부터 미국 외교관 접촉, 6·25전쟁 참전 실종 미군유해의 반환, 학술회의 교환방문, 쌍방 고위급인사 접촉 등 다각적인 대미 접근 노력을 경주해 왔다. 북한과 미국사이에 1998년 미국이 금창리 일대 지하시설에 대한 핵의혹을 제기함에 따라 지하시설 사찰 문제를 최대의 현안이 되고 있다. 북한을 이를 통해 경제제재 해체나 원조를 원하고 있어 쉽게 이견이 좁혀 지지 않았지만 1999년 그를 위한 협상이 계속 진행중이다.
일본과는 그 동안 사회당과 71년 11월에 구성된 일·조우호촉진의원연맹을 중심으로 부분적인 교류를 추진하는 한편, 조총련의 막후 지원에 힘입으며 일본에 대해 국교정상화를 제의하였다. 북한의 이와 같은 태도 변화는 국제적 고립 탈피와 일본의 자본과 기술, 특히 일제강점기의 피해 배상금을 받아 경제난을 해소하고자 하는 데 있다. 1997년 1차 고향 방문단의 일본방문이 이루어졌고, 1998년 2차 방문단도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행불자 문제가 외교적 현안으로 등장하면서 급속히 냉각되었다.
북한의 대UN외교는 1970년을 분수령으로 하여 이전까지는 UN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해 왔으나, 1973년 한국이 남북한 UN동시가입 불반대를 내용으로 하는 6·23평화통일 외교정책을 선언하자 북한도 조국통일 5대강령 발표로 맞서 단일국호에 의한 UN가입을 내세우면서 UN외교를 강화하였다. 이어 북한은 1973년 9월 5일 UN본부에 상주대표부를 개설하였고 제네바에 있는 UN사무국에도 상임옵서버대표부를 설치하였으며 이 시기부터 각종 UN산하 및 전문기구, 정부간 국제기구 등에도 가입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단일의석하의 공동가입을 주장하였으나 날로 심화되는 국제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991년 9월 18일 제46차 총회에서 한국과 함께 UN회원국이 됨으로써 국제무대에서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였다. 1995년 10월 현재 북한은 세계 132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으며, 지역별로는 아프리카가 43개국으로 가장 많고, 유럽이 다음으로 35개국이다.

키워드

  • 가격1,3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1.12.10
  • 저작시기2001.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061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