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추의 유령: 신역사주의와 19세기 영국소설

목차

1. 접속사의 문제

2. 유추의 유령

3. 푸코의 이름으로?

4. 어떤 역사인가?

5. 소설 밖의 역사

본문내용

몰락이 필연적임을 인식했고 이들을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인물들로 묘사했다는 점이, 그리고 그가 미래를 이끌 진정한 인간들이 다른 계급에 있었고, 당분간은 오직 이들뿐이었다는 점을 인식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 나는 리얼리즘의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늙은 발작의 가장 대단한 면모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Engels 92)
잘 알려진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명제가 나오는 편지글의 이 대목에서 역사는 변화의 필연성으로 인식된다. 역사와 접속의 관계 속에서 만나는 소설은 작가를 지배하는 실제 현실의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편견을 이기고,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잡아낸다. 하지만 신역사주의는 발작(Balzac)이라는 작가의 계급적, 정치적 편향을 문제삼으며, 이러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문헌들 몇 개를 발굴한 후, 발작이 비판하고 전복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는 통제를 강화할 뿐임을 반복해서 역설할 것이다. 밀러로 돌아가자면, 발작이야말로 '우범성의 영역'을 교묘히 이용하여 범죄자를 봉쇄하고 통제하는 작가가 아닌가? 그러나 엥겔스는 역사의 변화에 주목한다. 이러한 변화가 역사의 본질이라면 역사를 제대로 '재현하는' 소설은 역시 변화의 역동성을 감지한 작품들이어야 할 것이다. 루카치(Georg Luk cs)가 말하듯이, "주어진 사회의 객관적인 발전에 있어서 지배적인 [...] 경향들"(Luk cs 41)을 감지하고 간파하는 역동적인 '재현'이 고전적 소설들의 미덕이라면, '소설과 역사'의 관계 속에서 소설의 몫은 표면적인 유사성이 만들어내는 '유추의 환영'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역사의 흐름을 잡아내는 역사에 대한 해석으로서, 소설 밖의 역사가 자신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을 일깨워주는 예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헛된 환상이라면, 모든 변화와 변혁, 발전이 모두 환상이고 오직 '역사'와 '소설' 간에는 정신을 빼놓도록 끝이 없이 오고 가는 순환만이 존재한다면, 굳이 영문과를 차려놓고 소설을 읽고 소설을 가르치는 일을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소설을 잘 읽으려면 역사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소설이 역사 속에 존재할 뿐 아니라 역사를 소설이 재현하고 다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과 역사의 관계를 특정 역사철학에 근거해서 역사의 폐쇄성에 소설이 기여하는 한가지 모양새로 단정하는 것은 역사 공부의 측면에서 보나 소설 읽기 차원에서 보나, 역사의 패권을 장악한 나라의 엘리트로서 역사를 마감된 것으로 보고 싶은 이유가 많은 미국인들이 책을 펼쳐 놓고 불러내는 유추의 환영일 뿐이다. 그것이 모름지기 패배의 기억만을 물려받은 한국 땅에서 영문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전수돼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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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2001년 겨울비평이론학교에서 강의교재로 사용되었던 한국외대 영문과 윤혜준 교수님의 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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