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극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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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번역극 공연의 허실


(1)잔혹극이란 이름의 시적 분위기 - 극단 반도의 <쌍시>

(2)모노드라마의 허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모노드라마 - <로젤>

본문내용

여인들의 행위와도 상치되는 장치이다. 이는 옷벗기를 꺼리는 단'의 성격을 위한 배려로 보이나, 그렇더라도 거기에 치우치는 관객의 시선의 무게는 거의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더나은 방법을 모색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요컨대, 이 공연은 우리의 관객도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위한 6명의 여배우들의 철저한 프로정신에 의해 그 가치가 훨씬 빛나고 있는 의미있는 번역극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일보』, 1991.9.19)
왜 나는 번역극을 하는가 - 최근의 번역극 양산 풍조에 관하여
얼마전 극단 아리랑'에서 공연한 「격정만리」가 서울연극제에 참가취소 결정이 난 일이 있었다. 연극협회집행부의 취소 결정이유는, 「격정만리」가 이적성을 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연극사를 왜곡하였다는 것으로 크게 요약될 수 있었다. 하나의 공연을 가지고 이런 문제를 떠들어댄다는 것자체가 심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그 이면으로 「격정만리」가 집행부의 반감을 야기시켰을 만한 또다른 이유는, 오히려 오늘날의 공연행위와 관련된 문제라는 것을 조금 예민한 관찰자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격정만리」가, 일관하여 조선적 냄새가 나는 연극'을 바람직한 연극으로 간주하고 그와는 반대로 번역극은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인 것이다.
1991년 11월 국립극장'에서는 고골리의 「검찰관」을 무대에 올렸다. 왜 하필 「검찰관」인가. 1931년 조직된 극예술연구회'는 그 이듬해(1932년) 5월 제1회 공연으로 고골리의 「검찰관」을 무대에 올린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그 이유는 관객들이 풍습과 사상이 다른 낯선 외국극에 익숙할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배우들이 신파적 연기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이는 일본에서 연극을 공부한 당시의 선각자들이 일본에서 공연된 외국극의 레파토리를 무리하게 직수입한 데서 비롯된다. 당시 일본에서조차도 창작극이냐 번역극이냐하는 논쟁이 활발하였지만,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미 리얼리즘 기법에 의한 전통극 가부끼(歌舞伎)'가 성행한 뒤라서 그러한 외국 연극이 가져다 준 충격을 나름대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실상은 그렇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연극 측의 창작극 우선주의에 의한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며 이는 곧 연극대중화의 방안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으로 전개된다.
그렇더라 하더라도 당시의 극예술연구회 측의 노력은 진실로 값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세계관의 문제를 지적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지녔던 우리 조선에는 신극의 전통이 없다. 따라서 우선 번역극을 소개하여 관객에게 연극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하여야 한다. 는 주장은 일견 설득력을 갖는다. 문제는 그 목표가 얼마나 달성되었고 그리하여 그 뒤에 얼마만한 창작극이 생산되었느냐에 관련될 것이다. 이에 비할 때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가들이나 동양극장'의 연극인들은 창작극을 고집했다. 그것이 얼마 만큼 극적 완성도를 지닌 공연이었느냐는 별도의 지면을 할애하여야 할 전문적인 논문 주제의 문제일 것이지만, 아무튼 1930년대부터 우리의 연극사는 창작극이냐, 번역극이냐의 문제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오늘에 이르는 것이다.
이제 극예술연구회'가 조직된 지도 60년이 지난다. 어떻든간에 당시 극예술연구회에서 제기한 번역극 공연의 표면적 이유, 즉 관객에게 연극을 알게 하자는 선구자적 의식은 분명히 의의를 지닌다. 또한 그들의 번역극 레파토리를 보면 체홉, 셰익스피어, 입센, 버나드 쇼, 피란델로 등의 쟁쟁한 작가의 작품들이 대부분이며, 심지어 표현주의 작품까지도 있다. 이처럼 그들은 번역극을 하더라도, 나름대로 연극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되는 작가 혹은 작품을 들여 왔던 것이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왜 여전히 번역극을 하는가. 아직도 신극의 전통이 없어서 번역극을 하는가. 아니면 60년 전처럼 극작가가 없어서인가. 그렇다면 혹시라도 60년 전 만큼이라도 수준 높은 첨단사조의 번연극을 소개하고는 관객의 수준이 낮아서 실망했다는 한탄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매일매일 서울에서 공연되고 있는 20여 편의 공연 레파토리 중, 5∼6편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번역극이다. 과연 그러한 번역극들이 60년 전의 「검찰관」 만한 의의가 있는 것인가. 심지어는 수년전에 들여와서 장사 잘 된 기억을 살려 재탕·삼탕으로 베껴 먹기나 하고, 얼토당토 않은 주제의 연극도 관객만 몰리면 무기한 공연을 일삼고, 아니면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서 미처 소화도 못하는 외국의 대작을 시도하여야만 위신이 선다는 것인가.
번역극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연극관객의 저변확대를 위한다는 이유뿐이어서는 설득력이 없다. 전국민을 일상적인 연극관객으로 만들어야만 연극이 발전하고 그래야만 선진국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관객확대라는 미명 아래엔 바로 내 배가 불러야 남도 좋다고 하는 이기심이 숨어 있을 뿐이다. 번역극을 찾는 관객들은 이구동성으로 재밌잖아요 의 한 마디로 그 이유를 말할 뿐이다. 연극은 물론 재미있어야 한다. 그러나 재미에 몰리는 관객을 계속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눈벌겋게 더욱 재미난 작품을 찾아다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극작가들도 그러한 재미있는 작품을 쓰면 되지 않는가하고 순진한 사람은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극단의 실상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공연히 원작자와의 귀찮은 문제만을 야기하면서 굳이 위험부담을 지고 나서려는 연극제작자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바로 돈으로 요약된다. 번역극을 해서 관객이 몰리면 그 돈맛을 쉽게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해서 쌓인 역량(돈과 기술)을 그 다음에 창작극에 쏟아붓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20세기도 거의 끝나가고 화려했던' 연극의 해도 저물어간다. 이제는 연출가들의 보다 분명한 연극관이 요구될 때이다. 나는 왜 연극을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 선 다음이면 나는 왜 번역극을 하는가의 이유도 분명해질 것이다. 그럴 때만이 우리의 연극이 살고 우리의 문화가 바로 서게 된다.
(『MBC가이드』, 19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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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7.06
  • 저작시기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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