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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서 론
Ⅱ. 가족구조 속에서의 민비
1. 대원군과 민비
2. 고종과 민비
Ⅲ. 민비와 민씨척족세력
1. 민씨척족세력의 범주
2. 민씨척족세력의 정치지향성
Ⅳ. 정치적 변혁사건과 민비
1. 임오군란
2. 갑신정변
3.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
Ⅴ. 민비시해사건을 둘러싼 대외관계
1. 을미사변의 경위
2. 구미각국의 반응과 조선의 대응
Ⅵ. 결 론

본문내용

의 세력이 잠시 주춤해진 틈을 이용하였다.
아관파천기동안 조선정부는 朴定陽를 임시총리로 임명하여 親露內閣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민비시해사건의 처리책으로 당시 미우라의 허위조작에 가담하고 있었던 외부대신 金允植을 위시하여 兪吉濬, 趙羲淵, 張博, 權濚鎭, 李斗璜, 禹範善, 李範來, 李軫鎬등에게 체포 명령을 내리고 민비시해사건의 재조사를 고등재판소에 명하여 그 결과 「權在衡報告書」
) 權在衡報告書도 미우라 主謀이상의 閔妃弑害事件에 대한 진상을 규명한 것은 아니었다.
가 나오게 되었다.
한편 민비시해사건은 조선 민중들의 반일의병운동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우라와 김홍집정권이 사건을 훈련대의 소행이라고 선전하기에 애썼지만 조선인은 처음부터 시해의 범인은 일본군민이라는 사실과 사건의 진상을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하여 반일운동을 전개하였다. 儒生들은 廢后詔勅과 범죄자의 엄중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더구나 11월 15일 斷髮令이 발표되면서는 유생들의 反日 反政府運動은 더욱 고양되었다. 단발은 근대화를 표방하고 행해졌다고는 하나 일본화의 위기로 받아들여지고, 그 실시 방법도 강제적이었기 때문에 더욱 사회문제화되었다. 이들 유생들을 중심으로 反日義兵運動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일본군, 일본군용 전신선이나 일본상인, 어민들을 습격하고, 심지어 일본과 상거래를 하는 조선인이나 일본군대나 일본상인을 위해 편리를 도모하거나 그들의 용품을 조달하는 조선인들조차 위협하였다. 의병운동은 4, 5월경이 되자 정부군의 진압작전으로 점차 쇠퇴해 갔다. 그 원인은 유생 의병장들과 의병 농민군과의 서로간의 목표에 큰 차이가 노정되어 통일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다는 점과 때마침 농번기를 당하여 귀향하는 농민군이 생겨 재충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분산적인 투쟁을 하지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의병의 봉기로 일본은 실제로 일본상인 및 일본의 對朝鮮貿易에 큰 타격을 입게되었다. 실로 한사람의 反日者를 살해한 것이 몇십만의 反日 蜂起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 朴宗根著, 朴英宰譯, 앞의 책(1989) p.299.
Ⅵ. 結 論
지금까지 開化期 明成皇后 閔妃의 政治的 役割에 대해 살펴보았다. 閔妃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의 한계로 인해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는데는 많은 어려움과 미흡한 점이 있으나 대체로 파악된 민비의 정치적 역할을 평가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閔妃의 정치참여는 그 자신의 야망과 정치적 역량에도 기인한 것이지만 그보다도 한층 더 생각할 수 있는 점은 정치주도권을 둘러싼 大院君과 高宗의 왕실내부 특이한 갈등구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시아버지 大院君의 지나친 정치적 야망과 남편인 高宗의 親政의지 속에서도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한 성격에 의해 난국을 타개하는데 閔妃는 高宗의 방파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閔妃의 정치세력과 정치적 성격은 19세기 안동김씨 세도정치나 大院君 정권에서 보이는 왕권을 압도하고 전권을 행사하는 정치형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왕을 보좌해서 왕의 정치적 지지기반의 역할을 하였다. 즉 고종과 민비 그리고 민씨 척족들이 세력을 규합한 새로운 정치세력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閔妃의 정치기반은 곧 왕의 지지기반이었으며 바로 閔妃는 고종을 보좌하여 그 정치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왕권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閔妃는 高宗의 정책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당시 정국을 이끌어가는 중심체가 되었다. 그러나 그러는 과정에서 高宗과 閔妃의 갈등이 표출되지 않은 것을 보면 서로간의 신뢰와 의견의 합일을 이끌어냈으며, 특히 임오군란 이후로 高宗이 閔妃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민비의 정치적 행위는 더욱 능동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閔妃를 구심체로 하는 민씨척족세력의 정치지향성에 있어서 그가 추구한 개혁정책은 大院君의 보수성과는 달리 시대전환기에 어느 정도 역사적 흐름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자강을 위한 기술도입, 근대 서구문물의 적극적 수입, 그리고 대외관계에서 철저히 日本을 견제하고 열강의 세력균형 속에서 존립을 도모하려는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열강중에서도 조선에 영토적 야욕을 가지고 집요하게 정치, 경제, 사회전반에 걸친 침투를 단행한 것은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閔妃의 정치적 역할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王妃는 여성이기 때문에 王權 중심의 封建體制와 儒敎的 家父長制 사회에서 閔妃의 정치참여에의 정당성과는 관계없이 우선 왕비가 정치전면에 나선 것에 대한 거부감과 부정적 여론이 고조되어 많은 제약과 함께 쓸데없는 정치적 소모를 하였다. 이는 高宗의 과감한 정치적 능력이 발휘될 수 있었다면 오히려 閔妃의 총명성과 정치적 통찰력은 高宗을 뒷받침하여 개화정국에 효율적인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閔妃가 추구하였던 개혁정치의 이상에서 朝鮮이 근대화를 추진해야 하는 역사적 흐름은 정확히 인식했다고 볼 수 있으나, 근대화에 대한 전문지식이 결여되어 근대화의 길을 부국자강에만 집착을 했지 國權守護와 그것이 보다 견실하려면 궁극적으로는 民生의 안정과 民權守護가 동반되어야 함을 깨닫지 못하였다. 즉 체제변혁이 없는 봉건적 틀 안에서 근대화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또 하나는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고, 특히 日本의 침략을 견제해야 한다는 의식은 투철했으나 당위론적인 세력균형에만 집착한 나머지 제 3세력을 끌어들이는데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여 오히려 국가적 혼란을 야기한 면도 없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민씨척족 정권의 인사행정의 폐쇄성은 정국을 원활하게 풀어가지 못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새로운 근대적 기구가 설치되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개혁정치에서 폭넓은 인재등용이 절실한 상황이었는데 인사권의 독점으로 합리성을 결여하였다.
여하튼 閔妃는 철저한 반일주의자로서 日本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 후 朝鮮은 열강들이 내세우는 최혜국 조관에 의해 이권획득의 각축장이 되었다. 또한 민비가 시해당한지 10년후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화 하는데 목적을 달성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개화기 閔妃의 정치적 입지를 가늠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안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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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7페이지
  • 등록일2002.07.06
  • 저작시기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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