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한국 대중음악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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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첫번째 문제의식 : `가요(歌謠)`라는 용어

Ⅱ. 주류(mainstream)대중음악의 본질과 역사(1)

Ⅲ. 주류(mainstream)대중음악의 본질과 역사(2)

Ⅳ. 주류(mainstream)대중음악의 본질과 역사(3)

Ⅴ. 새로운 연대기의 시작 - 김민기 그리고 신중현

Ⅵ. 혁명적 낭만주의의 물결 - 김민기와 양희은

Ⅶ. 75년 긴급조치 시대의 <바보들의 행진>

Ⅷ. 암흑기의 아름다운 저항 <<공장의 불빛>>

Ⅸ. 가객 정태춘과 음유시인 조동진의 등장(1)

Ⅹ. 한국 록 음악의 비조 신중현

11. 단절과 봉합 : 산울림의 의의

12. 캠퍼 스 밴드의 백가쟁명

본문내용

을 내놓으며 구성원들 의 이합집산으로 생명력이 극히 짧았던 한국의 밴드 문화의 예외적인 면모를 보인다.
평지돌출이라고밖에는 규정할 수 없는 산울림 미학의 핵심은 강박관념에 사 로 잡히지 않은 악상 전개의 자연스러움과 표현의 제약에도 아랑곳 없이 빛나 는 '젊은' 한국어 사용의 파격이다. 언뜻 보아 양립 불가능한 이 두 명제의 결 합이 가장 빛나게 타올랐으며 또한 이들이 어줍잖은 인기인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을 일관되게 추구하는 음악가 집단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2집 과 같은 해에 발표된 세번째 앨범이다.
2트랙 녹음이라는 열악한 녹음 방식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의 머리곡인 <내 마음은 황무지>가 발산하는 공격적인 태도는 오늘에도 여전히 신선하다. 어쩌 면 이 곡은 문법적으로는 메틀이면서도 시대적 배경과 격렬하게 부딪히는 순결 한 질주의 미학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한국 대중음악사가 유일하게 수용하지 못 했던 서구 사조인 펑크의 유일무이한 한국적 모습이 아닐까? 그리고 20분에 달 하는 B면 전체를 채우는 <그대는 이미 나>가 보여주는 실험적인 시도는 어떤 가? 하지만 시장은 냉정하게 이 '작가주의'적 시도를 거부했고 이들은 최초의 실패를 맛보았다. 이 앨범은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 땅의 대중음악가들이 얼마나 험난한 벽 앞에 봉착하는 지를 예감케 하는 하나의 지표이다.
산울림의 음악적 태도 또한 특이하다. 이들은 캠퍼스 출신으로 또 하나의 봉 우리를 이루었던 김수철의 작은 거인과는 다르게 한국 록 밴드의 터전인 야간 업소에 출연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앨범과 독자적인 라이브 컨서트를 자신의 장 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들에겐 엘리트주의적인 선민의식도 혹은 위악적인 자기 과장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80년대의 개막을 앞두고 김창훈과 김창익이 연이어 입대하면서 홀로 남은 맏형 김창완은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를 위시한 발라드들이 담긴 6집(1980)을 발표하며 주류적 정서로 전 환한다. 다시 형제들이 가담하는 9집(1983)을 통해 산울림은 록밴드로서의 정체 성을 되살리지만 그것을 마지막으로 아래 두 형제는 각자 다른 직업을 택하고 만다.
. 캠퍼 스 밴드의 백가쟁명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전반은 캠퍼스 밴드의 전성시대였다. 졸업생과 재학생에 섞인 산울림이 시장 안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는 동안 재기 넘치는 기타리 스트 김수철이 이끈 작은 거인은 두 장의 앨범을 내 놓으며 진지한 수용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수도 없이 난립한 특권적인 등용문을 통해 대학의 아마튜 어 음악 청년들은 기약없는 무명 생활의 통과제의를 생략할 수 있는 특혜를 부 여받았다. <그대로 그렇게>의 페버스, <해야>의 마그마, <그 바닷가>의 벗님 들, <그때 그 사람>의 심수봉과 <돌고 돌아 가는 길>의 노사연, <바람이려오> 의 이용, <내가>의 김학래, 의 이선희 - 이 다양한 음악 청년들 뿐 만 아니라 나중에 방송진행자로 이름을 드높이게 되는 왕영은과 주병진도 이 끝없는 명단에 포함된다. 물론 1회 대학가요제 그랑프리 팀인 서울 농대의 샌 드페블즈나 TBC 젊은이의 가요제의 출품곡 <연>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 연 세대 밴드 라이너스 같이 아마튜어 교내 밴드로서의 성격을 버리지 않은 팀도 없지 않았지만 이 가요제들을 통해 스타덤으로 쾌속 진군하려는 야심은 곧바로 캠퍼스의 노래 문화를 상업적으로 유도하게 했다.
그러나 가장 선연한 주목을 모은 두 팀은 바로 배철수와 구창모가 각각 보컬 을 맡은 항공대의 밴드 런 웨이(RUN WAY)와 홍익대의 블랙 테트라(BLACK TETRA)였다. 이들은 1978년 동양방송이 주최한 제1회 해변가요제에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와 <구름과 나>를 출품하여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다. 이 두 팀을 주축으로 6인조로 재편성된 송골매는 1982년 <어쩌다 마주친 그대>(구창 모 작곡)와 <모두 다 사랑하리>(김수철 작곡)를 터뜨리면서 산울림 이후 주류 시장에서 성공한 첫번째 밴드가 된다.
이들의 연승 행진은 무서웠다. 세련된 서구 창법의 구창모와 질박하고 무뚝 뚝한 스타일의 배철수가 벌인 이인삼각의 이미지는 바로 이 밴드의 원동력이었 고, 또한 분규의 먼 원인이기도 했다. 결국 네번째 앨범을 발표한 뒤 구창모는 홀로 떨어져 나가 <희나리>를 성공시켰고, 나머지 다섯명은 '구창모가 없는' 송골매의 운명을 떠맡았다.
하지만 통산 다섯번째가 되는 1985년의 앨범을 통해 송골매는 하나의 훌륭한 한국의 록 밴드임을 스스로 증명하면서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 선제탄 은 <하늘나라 우리님>.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의 작곡자로, 록과 우리의 전 통적인 서정을 결합하는데 특출한 재능을 조용히 빛내 온 라원주가 제공한 이 노래는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라도>와 함께 송골매의 전화위복을 또렷 하게 주장한다. 화려한 도약과 수식을 배제한 낭송 조의 선율 진행은 이들이 소녀 팬들의 아우성으로부터 벗어나 이 땅에서 록 음악을, 혹은 밴드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되묻는 성찰의 작업이나 다름 없었다. 6집의 <어부사시 가>와 7집의 <처용>은 이와 같은 맥락의 연장선이다.
구창모가 탈퇴하면서 시장에서의 송골매의 상업성이 퇴조한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들은 1990년까지 아홉장의 정규 앨범을 끈질기게 발표함으로써 명실 상부한 80년대의 밴드로 이름을 새겼다. 그것은 바로 '스타'가 아닌 '밴드'의 승 리였다.
하지만 급속하게 진행된 대학음악문화의 상업화는 '광주'를 경험하며 '반미'의 구호를 가슴 속에 새겨 넣은 80년대 대학 세대로 하여금 록과 록 밴드를 '타락 한 제국주의 문화' 혹은 '서구 추종의 소비 문화'로 인식하게 하는 역기능을 낳 았다. 통기타를 기반으로 하는 대학의 노래서클(서울대의 '메아리'가 대표적이 다)이 현실의 모순과 동행하며 당국의 탄압과 대학 동료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동시에 받았다면 캠퍼스의 록 밴드는 '어용'의 낙인을 받으며 '자신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의 처지가 되고 만다. 서구에서는 영원한 동지의 관계로 발전해 온 록과 포크가 이 땅에서는 이상한 대립 아닌 대립의 위상으로 설정되는 아이러 니가 연출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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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9.22
  • 저작시기2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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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0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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