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교회사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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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로서 영원과 이 시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생면과 선택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구원은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빌리 선데이는 구원을 두 부분으로 설명했다. 즉 그것은 너의 마음으로 믿고 너의 입으로 고백하라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 무디, 샘 존슨 그리고선데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영생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다른 많은 물질과 행복, 건강, 그리고 부는 이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고 외쳤다.
이들은 죄악된 세상으로 부터 영혼의 구원을 강조하였고 예수의 재림에 의해서 구원을 말하였다. '천년주의'가 다시 부활하였으며 '여호와 증인'이 1914년을 재림의 해로 정하였다. 맥퍼슨은 "예수께서 곧 오시리- 그를 맞이할 준비하라"고 강조하였고 많은 교단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로서 알려진 천년주의의 관점을 널리 전파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분위기는 여러 설교가들에게 퍼졌는데 그중에는 켐벨 몰간과 무디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미국교회사 역사신학 1 이 상 조
제 11 장 Consesus and Conflict
세계 2차 대전이후 10년간, 미국의 종교들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사이에는 불안한 요소들이 많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전쟁후 종교의 "부흥"(revival)이 긍정적으로 제안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960년 끝무렵까지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신학은 점점 덜 확실해지고, 덜 건설적이게 되었다. 한 관점에서 보면, 전쟁후 에큐메니칼 활동을 낳았으며, 심지어 사람들은 이 시기를 "선한 뜻의 시기"(era of good will)로 특징지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국가와 교회들은 시민권 문제로, 공산주의와 비공산주의 문제로, 도덕적 책임과 보존문제로 깊이 분열되었다. 그러한 신호들은 종교가 consensus의 대리자로서, 또한 conflict의 경우로서 혼합되어 나타났다.
1) The World and its Wars
세계2차 대전과 연합동맹군의 승리의 결과물 중의 하나는 1948년 이스라엘 정부의 창설이었다. 유럽인들에게서 기원한 Zionist의 운동이 미국에서는 보편적으로 지지받지는 못했지만, 점점 폭넓게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창설후, 그리고 심지어는 1967년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6일전쟁이후, 미국에서는 반(反) 시온주의가 소량으로 줄어들었다.
1967년 이스라엘의 짧은 전쟁이 눈에 띌만한 성공을 거두었다면, 1960년대, 1970년대 미국의 오랜 전쟁은 비극적 실패를 거두었다. 그것은 전투현장에서의 비극과 국내에서의 비극이었다. : 베트남 전쟁(1964-1975) - "아득히 먼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이 절대로 필요한 관심이 무엇이었는가?" 우리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도덕적으로? 전쟁 끝무렵에 57,000명의 미국인들이 죽었고, 수천명의 말할수 없이 베트남인들이 죽었다.
2) The Nation and its Churches
국내 종교적 전선에서, 20세기의 중반은 1908년에 창설된 '교회들의 연방 협의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를 보다 강력하고 가시적인 '교회들의 국가 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1950)로 재조직하는 것이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2년전에 암스텔담에서 이미 창설되어, 두 번째 세계대회 소집 장소로 미국을 선택했다 : 1954년에 Illinois의 에반스톤에서. 1956년에는 격주 간행물 잡지인 Christianity Today가 발간되었다. 1960년에 장로교인 Eugene Carson Blake와 Episcopal James Albert Pike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재연합을 향하여"라는 교회연합에 관한 협의회를 형성하도록 자극했다. 그 뒤 10년안에 감독교인들과, 장로교인들, 회중교인들, 감리교인들, 그리스도의 제자들, 그리고 다른 교파들 모두가 함께 세울수 있는 견고한 기초를 찾아서 교회의 본성, 성례전과 예전, 신학과 신조들을 규정하였다.
물론 에큐메니칼적 선한 뜻의 합창에 반대한 다른 목소리들도 높았다. 장로교인 칼 멕킨타이어(Carl McInire)는 '기독교 교회들의 미국 협의회'(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를 조직했다. McIntire는 반(反) 정통교회, 반(反) Billy Graham, 반(反) Revised Standard Version of the Bible, 반(反) Brotherhood Week 였다. 1970년대에 루터란도 모더니즘과 근본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고통을 치루다, 1980년대에 완전한 연합에로 향하였다.
바티칸Ⅱ(1962-1965)가 공개적으로 열렸다. 교황 요한의 "혁명"은 로마 가톨릭의 더딘 근대화에로의 영웅이었다. 그는 비오Ⅸ의 Syllabus of Errors(1864)와 바티칸Ⅰ의 교황 무오설(1870), 비오Ⅹ의 Pascendi Dominici Gregis(1907)를 강하게 거부하였다.
동방정통교회는 종교개혁도 없고, 계몽주의도 거치지 않았고, 모더니즘과 근본주의의 강력한 도전도 없었고, 바티칸Ⅱ의 영향도 없었다.
3) Society and its Conflicts
"에큐메니칼 시대"와는 별도로,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유대교들과 교회들, 정치인들과 대통령들에게는 어려운 시기였다. 냉전의 시기로서 전 세계는 공산주의들과 비공산주의자들로 양분되는 듯 보였다.
마틴루터킹 목사의 탁월한 지도하에, 1950후반-1960년대에는 개신교, 가톨릭, 유대교, 그리고 정교회 모두는 시민권 운동에 공헌을 했다. 1960년, 민주당은 케네디를 대표자로 선출했다. 그후 케네디는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4) Revivalism and Retreat
300년 미국의 역사 속에서 종교적 부흥보다 "미국적인 현상"을 발견하기 어렵다. 세계2차 대전이후 10년동안 신앙부흥운동으의 지속적인 생명력을 대표할만한 사람은 빌리그레함 목사였다.
신학은 점점 비틀거렸다. 1960년대에는 "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인본주의"(religious humanism)에 관하여 논쟁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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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43페이지
  • 등록일2002.10.04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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