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의 구조와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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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공주공산성[公山城, 사적 제 12호]
- 조선후기 공주목(公州牧) 지도중의 공산성(公山城)
- 금서루
- 진남루
-쌍수정
- 쌍수정 사적비[지방문화재 제35호]
- 공북루[ 지방문화재 제37호]
- 연지 및 만하루[지방기념물 제42호]
- 임류각
- 광복루
- 명국삼장비
- 영은사
- 공산성 연못
- 동문루

본문내용

1947년 장마로 유실되었던 것을 1949년 공주고적보존회가 재건 하였으며, 지금의 문루는 1971년 전면적으로 해체 보수한 것이다. 문의 형태는 높은 석축기단을 좌우로 대칭시켜 조성한 후 그 위에 장대석을 겹쳐 덮은 다음 문루를 건축한 것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 팔작집이다. 문루의 남쪽 전방이 멀리까지 내려다 보이고, 주변에는 숲이 울창하게 어울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 명국삼장비-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6호
정유재란 이듬해인 선조 31년(1598)가을 공주에 주둔하면서 공주민을 왜로 부터 보호 해주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보살펴준 명나라의 3장수 제독 이공 위관 임제 유격 장 남방위의 업적을 기린 사은 송덕비로서 본래는 공주 금강변 남안에 세워졌던것을 공산성으로 옮겨왔었는데, 일제때 일인들이 공주읍사무소 뒷뜰에 매립하였던 것을 해방 후 다시 이곳으로 이전 한 것이다. 비석은 선조 37년(1955)에 건립된 것이며, 3개의 비석으로 되어 있다. 삼장비의 내용은 "명나라의 3장수는 정유년 이듬해인 선조31년 가을 공주에 이르러 군기를 엄히 다스리는 한편 주민들을 정성껏 보살펴, 공주민은 왜구의 위협하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고 임진년에 비로서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광복루 문화재자료(유형) 제50호
공산성의 동쪽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한 광복루는 원래 해상루라 하여 성내의 중군영의 문루였던 것을 중군영이 폐쇄되면서 일제초기에 이곳으로 옮겨 웅심각이라 불렀다. 이후 퇴락된채로 남아 있다가 1945년 공주 주민이 합심하여 보수하였으며, 이듬해 4월 김구, 이시영 선생이 이곳에 이르러 국권회복의 뜻을 기념하는 의미로 광복이라 하여 광복루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8각의 고준한 화강암 주초위에 고주를 올린 이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 임류각- 미지정
임류각은 백제가 공주로 왕도를 천도한 후, 약 25년이 지난 24대 동성왕 22년에(501) 왕궁의 동쪽에 건축한 고층건물로서,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사용되었으나 훼손되어 없어졌던 것을 1980년 발굴 조사하여 1993년 본래의 위치에서 윗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이 복원된 건축물이다. 복원된 임류각은 한쪽변이 10.4m의 정방형의 건물로 면적은 109㎡에 이르며, 초석의 배열은 남쪽열에 6매, 동쪽 열에 7매를 배치해 총 42매의 초석을 사용한 2층 형태로 조사된 임류각지의 규모에 맞게 조성된 대형 누각이다.
♠ 영은사 대웅전- 문화재자료(유형) 제51호
영은사는 조선 세조대왕의 사액으로 국가에서 창건하였고 광해조 7년 승장을 두고 전도사찰을 통관하였다고 공산지에 기록되어 있다.
♠ 동문루- 미지정
이 문은 훼손되어 유지만 남아있던 것을 1980년 발굴조사하여 건물 밑부분의 구조를 확인하였다. 성문의 너비는 2.5m였으며 문지옆 양쪽에는 원래의 문루를 지탱하였던 문지석이 그대로 발견되었다. 철종10년(1859)에 편찬된‘공산지’에 2층 3칸 이라는 기록을 바탕으로 1933년 조선시대 성문의 일반적 형식에 따라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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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1.06
  • 저작시기2002.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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