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산리 고분과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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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송산리 고분군 개관 - 고분군의 내부구조

- 무령왕릉
1. 역사
2. 구조
3. 출토유물

- 무령왕릉 발굴과 그 의미

본문내용

왕릉의 발굴로 인해 우리는 백제 왕실의 장례(葬禮)가 어떠했는지도 알 수 있다. 무령왕 지석에는 '왕이 계묘년(523) 5월 병술 그믐 7일 임신에 돌아가셨는데 을사년(525) 8월 계유 그믐 12일 갑신에 이르러 안장하여 대묘에 모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을사년(525) 8월은 왕이 죽은지 만 2년 3개월이 지난 때이다.
『북사』고구려조에는 '죽은 사람의 시신을 실내에 두었다가 3년이 경과해 길일을 택해서 매장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수서』동이전 백제조에는 '백제의 장례가 고구려와 같다'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의 장례가 고구려의 그것과 유사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죽은 다음 바로 안장한 것이 아니라 3년 정도를 경과한 뒤에 매장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다음 왕이 즉위한 수에 선왕을 매장했음을 말한다. 따라서 왕의 지석은 성왕(聖王) 즉위년에서 3년 사이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525년에 무령왕은 대묘에 안장되었는데, 그 장소는 바로 지금의 공주 송산리 무덤군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주변의 다른 무덤들도 왕족의 것이었다고 추측된다. 다만 무덤이 모두 도굴되어 그 주인을 알 수 없다.
나머지 하나의 지석에는 왕비의 죽음과 매지(買地)에 대한 내용이 있다.
무령왕 지석과 함께 먼저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왕비 지석의 앞면의 내용은 왕비가 합장됨에 따라 왕비 지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매지권이 작성된 시기는 525년으로, 무령왕 지석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왕비는 그 뒤 526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비에 대한 내용은 매지권과 같이 525년에 작성된 것이 아니고, 왕비를 무령왕과 합장하는 529년에 매지권 뒤에 추기해서 넣은 것이다
토왕(土王)은 황천을 지배하는 전체의 토지신이고, 토백(土伯)은 그 지역의 토지신으로서 명령이나 장부를 담당한다. 토부모(土父母)는 묘역의 토지신으로서, 중국의 매지권에는 없는 표현이다. 묘지를 쓰면서 관장하는 모든 신(神)에게 고하니 땅을 사니 그 지역은 신성 불가침한 무령왕의 영원항 안식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왕비 지석 뒷면의 내용은 토지신과의 계약을 담은 의례적인 의미로서의 매지권(買地券) 또는 이를 통해 귀신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명권(冥券)의 의미를 가진 것이기도 하다.
무령왕의 발굴로 인해 알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그 당시 백제인의 종교 사상이다. 능의 구상은 일부 중국의 영향을 박은 토착신앙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연도의 앞부분에서 입구쪽을 향하여 서 있는 진묘(鎭墓) 일각수(一角獸)의 뭉툭한 입에는 붉은 색깔이 칠해져 있다. 이 붉은 색은 벽사의 그것이다. 이는  사상에서 나온 벽사진경(酸邪進慶)의 힘을 붉은 색깔이 가지고 있다는 사상에 근거한다.
매지권에 보이는 "土王土伯土父母" 은 토착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에 의하면, 토왕은 "토기성야(土氣盛也)"이라 하여 토기(土氣)가 왕성한 것을 일컬음이요, 토백(土伯)은 "后土之侯伯也"라 하여 토지(土地)의 신이라 했고, 토부모(土父母)는 없고 다만 토부만 등재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자어(童子魚)라하여 물고기 이름이라 풀이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땅에 대한 권한의 차례에 따라 토왕(土王), 토백(土伯), 토부모(土父母)한 신들은 백제의 고유의 토착신앙에 말미암는 것이다.
또 왕과 왕비는 모두 사후 27개월간 거상(居喪:부모님상을 당하고 있거나 부모상을 당하고 있을때의 상복)을 마친 뒤 안장하였다는 것에서 장례는 엄격한 유교의식에 의거하였고 장례의 모든 절차도 유교의식에 따라 진행되었음이 분명하다. 또 왕의 지석 이면에 있는 방위도(方位圖)는 음양에 따른 간지(干支)로서 오행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음양오행사상은 유가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왕비의 연령이나 성명을 일체 밝히지 않는 것도 남존여비의 유가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의 사서에 백제에는 도사(道士)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도가 사상은 어떤 형태로든 널리 퍼졌을 것이다. 무령왕릉에서는 세가지 면에서 도교사상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하나는 묘자리의 정함이다. 이른바, 풍수라는 것인데 이것은 도가사상과 관련이 깊다. 다른 하나는 매지권이다. 지하(地下)의 소유권을 지상의 왕이 지배할 수 없는 별개의 것으로 보아 지배자인 토왕 및 그 부속관원들에게 일방적으로 돈을 내어놓고 땅을 사고 또 그것을 증명으로 확인하는 따위는 모두 도교의 산물로 보인다. 또 하나는 출토품중 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과 방격규구신수경(方格規矩神獸鏡)에 새겨 있는 "상유선인 부지로(上有仙人 不知老)"라는 문구인데 이것도 도교신앙의 산물임이 분명하다.
무령왕릉의 내부와 부장품에는 불교의 채취가 뚜렷하다. 능의 연도와 현실이 온통 연화문(蓮花紋)으로 장식되어 있다. 연화문 전실(塼室) 세 벽에 벽감(壁龕)이 5개가 있으며 그 속에 백자등잔(白磁燈盞)이 하나씩 안치되어 불을 밝혔는데 그것의 연화 세계를 이루는 연등공양의 하나이다. 금제 뒤꽃이와 왕비의 두침(頭枕)에 연화문이 있는데 이 또한 불교사상을 보여준다.
천여 년 이상 잠자고 있던 무령왕릉이 우연히 세상에 알려지게 됨으로써 무령왕의 생애와 함께 무덤을 쓰면서 행해졌던 매지(買地)의례와 그밖에 백제사의 단편들을 복원할 수 있었다. 실로 백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름표를 단 유물이야 말로 막연했던 역사의 복원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참고 문헌
<백제 고고학 연구> 학연문화사. 윤무병 1993
<백제사 연구> 일조가 이기동 1996
<금석문으로 본 백제 무령왕의 세계> 원광대 출판국 소진철 1981
<백제 무령왕릉> 백제문화 연구소 공주대 충청남도 백제문화연구소 1991
참고 사이트
http://nongae.gsnu.ac.kr/~his/ds3-3.htm
http://www.cngje.go.kr/html/tour2.html
http://www.newtrip.co.kr/culture/jungwon/muryung_tomb.htm
http://hometown.weppy.com/~younglov2/
http://gongju.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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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10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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